올해 오스카 레이스에서 주목받으며 또 한번 할리우드에 한국 바람을 일으킬 것으로 기대되는 영화 <미나리>를 보았습니다. 영화에 출연한 윤여정 배우가 각종 비평가 협회상 등 미국 유수의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받으며
오스카 여우조연상 노미네이트에 대한 기대도 무척 큰 가운데, 영화는 작년의 <기생충>을 잇는 화제작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나리>는 <기생충>과는 확연히 다른 성격으로 훌륭한 영화입니다.
한국 사회를 이미 통달하고 있는 한국영화라면 새롭지 않은 시도일 수 있겠으나,
이토록 한국과 한국인, 한국인의 삶에 대해 온전히 담고 있는 미국영화는 분명히 소중합니다.
1980년대 초 엄마와 아빠, 남매로 이루어진 한인 이민자 가족이 아칸소의 시골 마을로 이사를 옵니다.
캘리포니아에서의 삶을 접고 이들이 여기로 온 것은 아빠 제이콥(스티븐 연)의 원대한 꿈이 있었기 때문인데,
그의 꿈은 바로 50에이커의 땅을 일구어 한인들을 위한 농장을 꾸려 성공하는 것이었습니다.
보다 현실적인 엄마 모니카(한예리)는 영 마뜩찮고, 앤(노엘 케이트 조)과 데이빗(앨런 김) 남매는 '바퀴달린 집'에서의 삶이 기대반 걱정반입니다.
엄마와 아빠가 병아리 감별사로 일하는 동안 어린 남매를 돌보기 어려워지고, 한국에 있던 외할머니 순자(윤여정)가 먼길 건너 찾아옵니다.
고춧가루, 멸치 등을 바리바리 싸들고 오신 엄마의 모습에 딸 모니카는 대번에 눈물부터 짓지만,
줄곧 미국에서 살아온 남매에게는 지극히 한국적인 할머니가 그려왔던 할머니의 모습과 맞지 않아 영 낯섭니다.
특히 장난꾸러기 데이빗은 대놓고 '한국 냄새 나는 할머니 같지 않은 할머니'라며 불평을 해댑니다.
그러나 이에 아랑곳않고 할머니는 입에 쓰지만 몸에 좋은 한약도 먹이고, 냇가 주변에서 미나리 심는 것도 알려줍니다.
그러는 사이 가족의 부단한 삶을 따라 농장은 일구어 가지만, 순탄하지만은 않습니다.
이 영화를 연출한 정이삭(리 아이작 정) 감독의 실제 유년기 경험담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는
감동적인 드라마에서 기대할 법한 뚜렷한 굴곡은 없지만, 그 자체가 이미 풍부한 드라마를 지닌 디테일이 있습니다.
직접 겪은 일이 아니고서는 나올 수가 없는 그 한국적인 디테일은 어느 순간 미국영화라는 걸 잊게 할 정도죠.
그 먼 거리는 아무렇지 않았다는 듯 귀한 식재료들 챙겨오시고, 머리에 피도 안마른 아이들에게 화투 재밌다고 알려주는 할머니, 아칸소 시골 마을에서도 한국식 집밥 꼬박꼬박 챙겨먹고 부엌에는 간장이나 물엿 등 한국식 조미료들이 늘 놓여져 있는 풍경, 아이가 말썽 부렸다 싶으면 아빠는 앞에서 회초리 맞자고 하고 엄마는 가만히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모습. 외부인이 만든 '신기한 한국인 사전'이 아니라, 정말 그 삶을 살아낸 사람이 기억하는 시절의 공기를 담았달까요.
대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한국말도 우리가 흔히 쓰는 구어체에 상당히 가깝게 다듬어진 느낌입니다.
분명 영화 속 가족의 삶은 고단하지만, 영화는 멈춰 있거나 매우 부드럽게 움직이는 사려 깊은 카메라와 따뜻한 색감,
교향곡처럼 장면장면을 넓은 품으로 끌어안는 음악을 동반해 '기억하고픈 소중한 시절'의 의미를 부여합니다.
이런 요소들을 따라 그려지는 것은 낯간지럽거나 신경질적이거나 대체로 둘 중 하나인 여느 미국영화 속 가족과는 다른,
원망과 그리움과 미안함과 애틋함이 뭐라 표현할 수 없이 뒤섞인 한국의 가족입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위기나 지독한 악역이 나타나 이 가족의 꿈을 위태롭게 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굳이 그런 인위적인 장치를 놓지 않아도 본능적인 소외감, 낯선 환경에서의 경계심과 불안 같은 것들로 이미 가족은 고단합니다. 생소하고 척박한 환경은 이미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가족 안에서도 새로운 갈등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그 갈등을 어렵게 통과하며 화해하고, 그렇게 더욱 단단해지는 가족의 모습은
1980년대 한인 이민자 가족이라는 특수성과 전혀 상관없이 우리들 그 누구와도 다르지 않습니다.
어디에 심어놔도 뿌리 내리는 법을 알고 자라날 줄 아는 미나리의 특성은 조용하지만 강인한 가족의 모습과도 같을 겁니다. 뿌리를 내리려면 필연적으로 흙더미와 마주해야 하듯, 시련 속에서 요란하게 무릎 꿇거나 일어서지 않아도
필연적으로 버티고 나아가며 단단해지는 그들의 모습은 어느덧 우리들의 가족사도 그러했을 것처럼 우리 마음에도 뿌리를 내립니다.
뛰어선 안된다고 여겼던 나를 뛰게 하고, 구할 수 없을 거라 믿었던 서로를 구하게 만들어 왔을 우리들의 가족 말이죠.
이 '한국인 가족이 주인공인 미국영화'를 '한국영화'처럼 볼 수 있게 한 데에는 정말 가족처럼 어우러진 배우들의 호흡 덕도 큽니다. 아빠 제이콥 역의 스티븐 연 배우는 (역할이 역할이어서도 있겠지만) <버닝> 때보다 더욱 능숙해진 한국어 소화력을 보여주는데, 이민 1세 한국인 캐릭터로서의 한국어 억양을 비교적 잘 표현하는 한편 서툰 영어 구사 연기까지도 자연스럽게 보여줍니다.
무엇보다 가족을 위한 자신의 꿈이 성장하고 좌절하는 과정에서 분투하는 보통 아빠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리며 울림을 줍니다. 엄마 모니카 역의 한예리 배우는 가족의 꿈과 미래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할 수 밖에 없는 엄마로서의 모습과 먼길 찾아 타국에 온 엄마에게 떳떳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픈 딸의 모습을 오가며 역시 보는 이의 가슴을 저미게 합니다. 생활연기에 워낙 일가견이 있는 배우이기도 하지만, 이 영화에 한국인의 이야기로서의 공기를 일절 어색함 없이 담아냅니다. 혼란과 고민을 겪기도 하지만 의젓한 면몰르 보이는 첫째 딸 앤 역의 노엘 케이트 조 배우,
말썽도 많이 피우지만 그저 사랑스럽고 귀여울 뿐인 둘째 아들 데이빗 역의 앨런 김 배우는 내내 보는 이를 흐뭇하게 합니다. 마치 가족을 위한 언덕처럼 보살피고 보듬고 지켜보는 할머니의 모습을 따뜻하게 그려낸 윤여정 배우는
역시나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 한편 오스카 여우조연상 부문의 강력한 후보라기에 우리에게는 이미 너무나 친숙한 느낌입니다. 그러다가 이토록 친근했던 윤여정이라는 배우의 오리지널리티가 사실은 이토록 귀중한 것이었다는 사실에 감동하게 됩니다.
<미나리>는 관객을 깜짝 놀라게 하는 영화는 아닙니다. 특히 한국 관객에는 더욱 그럴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영화가 끝난 후 이 가족이 어딘가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지 머릿속에 생생히 그려질 것만 같고,
할머니 냄새부터가 싫다던 막내 데이빗이 할머니가 키운 미나리를 향이 셀텐데도 맛있게 먹을 모습을 떠올리게 되고,
시련과 좌절을 거쳐 힘겹게 일궈낸 농장이 뿌린 씨앗 위에서 자라난 한인들의 삶이 미국 어딘가에서든 나타날 것만 같습니다. 훌륭한 영화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특수하면서도 보편적인 이야기를 보여준다고 생각하는데,
어떤 시절, 어떤 지역의 어떤 사람들의 이야기가 우리 이야기, 나아가 온 세상 이야기 같다는 걸 생각하면 <미나리>는 훌륭한 영화일 것입니다.
시린 바람처럼 눈물 짓게 하는 대신 너른 햇살처럼 우리를 끌어안으며 깊은 여운을 새길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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