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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만대장경이 사라질 뻔한 순간이 3번 있었다.

 

첫 번째는 바로 조선의 세종대에 벌어진 일로, 당시 일본을 지배하던 무로마치 막부는 팔만대장경판에 크게 관심이 없었지만 지금의 주고쿠 지방인 스오의 슈고 다이묘인 오우치씨가 대장경판에 상당히 관심을 가졌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오우치씨는 백제 임성태자의 후손인 도래인 가문으로서 친조선 정책을 취했고 조선 정부에서도 오우치씨를 백제의 후손으로 인정해서 조선 초기에 상당히 교류가 많았다. 그러던 와중 오우치 요시히로는 조선에 꾸준히 팔만대장경판을 달라고 요구했다. 당시 여전히 불교가 중요했던 일본과는 달리 조선은 숭유억불이 기조였기 때문에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이를 파악한 조선 조정에서는 대장경은 나라에서도 귀한 것이라는 연유로 거절하였다. 그럼에도 일본이 끊임없이 대장경을 청구하자 세종이 대장경판을 넘겨줄까 했다가 신하들의 반대로 철회한 후 기존의 방침을 고수했다.

 

 

임금이 대장경판은 무용지물인데 이웃나라에서 청구한다 하여, 처음에는 이를 주려고 하매 대신들이 논의하여 말하기를,

“경판은 비록 아낄 물건이 아니오나, 일본이 계속 청구하는 것을 지금 만약에 일일이 좇다가 뒤에 줄 수 없는 물건을 청구하는 것이 있게 된다면, 이는 먼 앞날을 염려하는 것이 되지 못하옵니다.'

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임금이 일본의 청구에 응할 수 없다고 답한 것이다.

세종실록 세종 5년(1423) 12월 25일 기사.

 

 

세종이 불교에 귀의한 것은 만년의 일이고, 대장경이 지금에나 중요한 문화재로 여겨지지 당시에는 그냥 많고 많은(그리고 실생활에 그다지 쓸모도 없는) 불교 유물 가운데 하나였다. 조선 왕조가 애초에 유교를 국시로 삼았던 만큼 불교 유물을 외국에 넘겨서는 안 된다고 주장할 사람도 조정에는 더 이상 없었다. 대신들이 대장경을 일본에 주지 말자고 반대한 것은 종교적인 이유가 아닌 경판이 소중한 물건은 아니지만, 그걸 요구한다고 줬다간 나중에는 더 큰 것을 요구할 것이라는 정무적 판단 때문이었다. 결국 세종은 이를 받아들여 그냥 인경본을 주는 것으로 무마했다. 덧붙여 세종은 이걸 한양으로 옮겨 보관할까 하기도 했다.

 

 

임금이 승지들에게 이르기를

"일본국에서 매양 대장경판(大藏經板)을 청하니, 우리나라에서 불교를 숭상하지 아니하여, 이 판이 밖에 있기 때문에 억지로 청하면 반드시 얻을 것이라고 생각한 까닭이다. 지난 날에 이 판을 구하기에, 대답하기를, '우리나라에서 전해 내려온 국보를 가벼이 남에게 줄 수 없다.'고 하였더니, 저들이 얻지 못하고 돌아갔다. 이 판을 도성 근방인 회암사나 개경사(開慶寺) 같은 곳에 옮겨 두면, 저들도 이를 듣고 우리 나라의 대대로 전하는 보배라는 뜻을 알고 스스로 청구하지 않겠지만, 단지 수송하는 폐단이 염려되니, 그것을 정에 논의하라."

하니, 모두 말하기를,

"수송하는 폐단이 있사오니, 그 감사로 하여금 검찰하여, 그 수령으로 하여금 맡아서 더럽히거나 손상시키지 못하게 하고, 수령이 갈릴 때에는 장부에 기록하여 전해서 맡게 함이 마땅하옵니다."

하므로, 그대로 따랐다.

세종실록 세종 19년(1437) 4월 28일 기사

전해 내려오는 기록들을 살펴보면 일본뿐만 아니라 류큐 왕국도 시시때때로 사신을 보내서 조공하고 팔만대장경판의 인경본을 받아갔다. 류큐에서는 여러 번 팔만대장경판의 인경본을 받아가다가 아예 원판을 달라고 요구했지만 조선이 이를 거부해서 인경본을 받아갔고, 슈리성 옆의 엔가쿠지(円覚寺)에 보관했지만 1609년 사츠마번이 침공하여 소실되었다. 그리고 인쇄본으로 만족하지 못한 일본은 팔만대장경을 갖기 위해 가짜 나라를 내세워 조선과 우애를 위하여 달라고 하는 사건을 벌이기도 했다. 1484년 이천도국이라는 가짜 나라 사신을 내세워 요구했다가 거부당했고, 1741년에는 구변국이라는 가짜 나라를 내세워 같은 짓을 하려다가 역시 거부당했다. 급기야는 해인사로 무장 군대를 보내 약탈하려다가 무산된 적이 있다고 한다.

 

일본이 대장경을 요구한 적이 80번은 된다고 한다.

 

그렇게 잦은 일본측의 노림에도 조선 조정은 대장경을 넘겨주지 않았고, 대장경은 임진왜란의 병화도 용케 피했다. 일제강점기 때도 시도 때도 없이 노렸는데, 해인사 승려들이 '차라리 장경을 불태워서 같이 타 죽겠다.'고 하며 죽을 각오로 막았기에 일본도 번번이 반출하는 데 실패했다. 심지어 한 승려는 칼을 가져와 자해하면서 '대장경을 가져간다면 내 피로 더럽히고 내 원한을 묻혀 보관하는 일본 어디라도 저주를 내리겠다.'고 할 정도로 목숨을 바칠 각오로 막았다고 한다. 오죽하면 매천야록에서 황현도 이에 대해 감탄하기도 했다.

 

 

 

 

두 번째는 해인사에 벌어진 화재들. 해인사는 여기저기가 일곱 번에 걸쳐 불이 나며 꽤 큰 피해를 입었으나, 그때마다 대장경은 멀쩡했다.

숙종 21년(1695): 동쪽의 많은 요사와 만월당, 원음루 화재

숙종 22년(1696): 서쪽의 여러 요사와 무설전 화재

영조 19년(1743): 대적광전 아래 수백칸 당우 화재

영조 39년(1763): 화재

정조 4년(1780): 무설전 화재

순조 17년(1817): 수백칸 당우 화재

고종 8년(1871): 법성요 화재

 

사실 이는 단순히 운이 좋았던 것만은 아니고, 이를 보관한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이 화재를 방지하는 과학적 설계와 배치가 되어있었던 덕분이기도 하다. 물론 아무리 그래도 기본적으로 나무로 만든 목조건물이므로 화재에 굉장히 민감한데 이를 모두 버텨냈다.

 

 

 

 

세 번째로 경판들이 소실될 뻔한 일은 한국전쟁 때 미국 공군이 공습할 때다. 전쟁 중에 빨치산들이 해인사에 숨어들자, 미군 군사고문단이 한국군 F-51 조종사였던 김영환 장군(당시 대령)에게 빨치산 소탕을 위해 해인사 폭격을 명령했지만, 김영환 장군은 문화재 소실을 우려해 빨치산은 금방 빠져 나갈 것이나 문화재를 잃으면 복구할 길이 없다는 근거를 들어 명령을 거부했다. 결국 팔만대장경은 지켜냈지만, 김 대령은 당시 군법에 따라 전시 명령 불복종으로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이승만이 총살하라며 대노할 때 배석했던 김정렬 초대 공군참모총장(김영환의 형. 훗날 국방부장관을 거쳐 국무총리가 된다.)이 팔만대장경의 중요성을 역설했고, 김영환 장군에게 그간 세운 전공이 있었던 덕분에 즉결처분은 모면했다고 한다.

 

이후 김영환 장군의 예측대로 빨치산들이 곧 해인사를 빠져나간 덕분에 대장경은 무사히 보존될 수 있었다.이 공로로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에 김영환 장군에게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으며, 현재 해인사 경내에 김영환 장군을 기리는 공적비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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