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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

 

대한민국 경기도 구리시 소재, 일설에 다르면 조선의 태조 이성계는 태종 이방원에게 자신의 사후, 자신을 고향인 함흥 땅에 묻어 달라고 유언했지만 태종 이방원은 어찌되었든 개국 시조인 부왕을 수도인 한양에 가까이 모셔야만 자기의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으므로 태조 이성계의 왕릉을 한양 근처에 모시고자 했다. 한편으로 태종 이방원은 태조 이성계의 유언도 지키기 위해서 결국 함흥의 흙들과 억새를 가져다가 한양 인근에 건원릉을 단장했다고 전한다.

 

* 관리가 안돼서 저런 게 아니다. 억새를 실수로라도 날려버리는 순간 고인의 유언을 어기는 게 되어버려서 그런거다.

 

 

 

 

 

 

고려 태조 왕건의 '현릉'

 

북한 개성특별시 해선리 소재, 태조 왕건과 즉위 전부터 아내였던 신혜왕후 유씨와의 합장릉이다. 북한의 국보 제 179호이며 유네스코 세계유산 개성 역사유적지구로 등재되었다. 현재 태조 왕건의 현릉은 북한의 개건 작업으로 단장된 모습이며, 봉분의 크기도 창업군주인 만큼 다른 고려 왕릉에 비해서 확연히 큰 모습을 보여준다. 무덤에서 벽화가 그려졌던 점, 부장품으로 전신 청동상이 출토되었다는 사실에서 보자면 고려 태조 왕건의 왕릉은 고구려 문화를 이어받은 흔적이 많다.

 

 

 

 

 

 

가야 수로왕 김수로의 '수로왕릉'

 

대한민국 경상도 김해시 소재, 가락국(금관가야)의 시조이자 김해 김씨의 시조로 알려진 수로왕의 무덤으로 납릉(納陵)이라고 부른다. 『세종실록』 에서도 선조대 왕릉으로 특별 관리를 받았던 기록들이 보인다. 1580년(선조 13)에 수로왕의 후손인 허수가 수로왕비릉과 더불어 크게 정비하여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峰類洩)』 에 따르면 수로왕릉이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게 도굴을 당하여 내부가 드러났는데, 순장된 여자 시신 두 구가 있었다고 한다. 기록을 신뢰한다면 수로왕릉은 석실묘였던 셈이다.

 

 

 

 

 

 

고구려 동명성왕 고주몽의 '동명왕릉'

 

북한 평양직할시 력포구역 룡산리 소재, 알려진 걸로는 장수왕의 평양 천도 이후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의 왕릉을 도읍 인근에 이장했다고 하지만... 근거는 확실한 게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규모상 예전부터 고구려의 왕릉으로 인식되어 조선 왕실에도 제사받은 기록이 존재하고, 무덤 자체도 5-6 세기 고구려의 고분 형태인 것은 확실하기에 고구려 고분군의 자격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선정되었다. 현재 모습은 북한의 개건 작업으로 왕릉이 원래 모습에 비해 확장된 모습

 

* 중국의 집안 고분군에서만 보던 연꽃무늬가 발견된 굴식 돌방무덤 형태의 고구려 고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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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반도 유일 사생아 출신 군주 (왕자였던 삼촌과 왕후였던 조카가 몰래 사통해서 낳은 사생아 출신)

 

2. 모친이 방에서 편하게 출생도 못하고 문 앞의 버드나무 가지를 부여잡고 간신히 아이를 낳은 후 산욕으로 사망하여 고아가 됨

 

3. 당시 임금 성종이 왕족의 사생아 이야기를 듣고 아기를 궁궐로 데려왔는데 애기가 성종보고 아버지라고 두번 불르니 그 처지가 너무 가엾고 불쌍해서 임금이 뚝뚝 눈물을 흘렸음

 

4.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현종의 존재를 껄끄럽게 생각해 죽이려들자 어린 나이에 절로 피신시킴

 

5. 절에 천추태후가 보낸 자객들이 찾아와 독이 든 음식 먹을뻔하고 칼에 맞아 죽을뻔하는 어린시절을 보냄

 

6. 절의 진관이란 스님이 절간 방 아래에 비밀 통로로 굴을 파놓아서 여러 차례 자객에게서 현종을 구함

 

7. 강조의 정변으로 천추태후가 실각하자 사람들이 현종을 찾아와서 왕위에 오름

 

8. 2차 여요전쟁때 강조가 고려군 다 긁어모아 나갔다가 발리고 전라도 나주까지 피난을 감

 

9. 피난 가는 길에 지방 호족들이 임금 우습게 알고 온갖 깽판을 쳐서 생고생함

 

10. 거란군이 피로로 물러나자 복귀해서 3차 여요전쟁 이전까지 숨겨왔던 왕의 재목을 엄청나게 펼쳐서 내정을 정비

 

11. 3차 여요전쟁때 강감찬을 총지휘관으로 삼고 반대를 무릅쓰고 극단적인 청야전술을 승인하여 맞서 싸우게함

 

12. 조선시대의 선조나 인조와 달리 끝까지 도성에 남아서 수비에 임전해서 백성들도 감동받음

 

13. 귀주대첩에서 강감찬이 한민족 역사상 손에 꼽히는 대승리인 귀주대첩을 만들어냄

 

14. 돌아오는 강감찬과 군사들을 성 밖까지 마중나가서 일일히 환영함, 백성들은 모두 열광의 도가니로 한데 어울려 축제를 벌임

 

15. 전쟁 중과 전쟁 후에도 내정을 완벽하게 하고 외교정책도 훌륭하게 펼쳐서 귀주대첩 승리 이후 고려의 동북아 위상이 역대 최고로 상승

  (이 때 고려의 사신이 중국 송나라로 가서 갑질을 하고 깽판을 쳐도 중국 신하들이 뭐라고 말을 못할 정도였다고 함)

 

16. 거란의 침입을 이겨내기 위해 왕실, 귀족, 백성들이 한마음이 된 대역사인 대장경을 만듦

 

17. 파란만장한 삶을 거치며 쌓아왔던 왕후와의 러브스토리도 존재함

 

18. 자식교육도 끝내주게 해서 3명의 아들 덕종 정종 문종이 모두 왕위에 올라 정치를 잘 했고, 그 중 문종은 고려의 세종이란 평가를 후세에 들으며 고려 최고의 명군으로 인정받음

 

19. 120여년간 이어지는 한반도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열고 본인은 그 출발점에서 파란만장한 인생사 때문에 40세에 사망

 

20. 고려 말의 대학자 이제현이 "나는 현종에게서 아무런 흠도 찾아볼 수 없다" 고 극찬하는 등 아들 문종과 함께 고려 최고의 명군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김

 

 

 

북한에 남아 있는 고려 현종의 선릉

 

 

 

 

출처: 소주담(談) : 소소한 주민들의 이야기  글쓴이: 내딸금4wal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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