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쌍릉' 항공사진
전라북도 익산에는 오래전부터 민간에서 '대왕릉' 과 '소왕릉' 이라고 불리는 두 개의 큰 무덤이 있었다.
고려시대부터 이 무덤들은 확실치는 않았어도 규모상 왕릉급으로 추측되었다.
대왕릉의 돌방
그러다 세월이 흘러 무덤 내의 보물들은 1917년, 일제 강점기때 전부 도굴되었다.
겨우겨우 사람의 어금니 몇개와 목관의 잔편, 그리고 목관 장신구 몇 점을 건질 수 있었고,
이들은 모두 국립전주박물관에 보관하게 되었다.
무왕이 창건했다는 <미륵사> 모형, 사찰의 중앙과 그 양편엔 9층으로 된 목탑과 석탑이 배치되었다 전한다.
광복 이후로 익산의 백제사에 대한 연구조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지만 자료가 전무하고 기술조차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
익산 지역의 백제사에 대한 연구와 궤를 같이하며 쌍릉에 대한 단서도 그저 오리무중이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다.
미륵사지 서탑의 금제 사리봉안기 발견 당시 모습
마침내 2009년, 미륵사지의 서탑의 해체-보수공사 과정에서 금제 사리봉안기가 발견,
이때 발견된 문서들은 기존 백제 역사의 학설들을 뒤엎어 버리게 된다.
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봉안기
"우리 백제 왕후께서는 좌평(佐平)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따님으로 지극히 오랜 세월[曠劫]에 선인(善因)을 심어 금생에 뛰어난 과보[勝報]를 받아 삼라만상을 어루만져 기르시고 불교[三寶]의 동량(棟梁)이 되셨기에 능히 정재(淨財)를 희사하여 가람(伽藍)을 세우시고, 기해년(己亥年, 639) 정월 29일에 사리(舍利)를 받들어 맞이했다."
이는 무왕의 왕비는 신라의 선화공주이고, 이 둘의 발원에 의해서 미륵사가 조영되었다는
『삼국유사』 에 기반한 역사적 정설이 붕괴된 것을 말하고,
SBS 드라마 '서동요' 의 선화공주(이보영)
또한 무왕의 왕비가 사실은 선화공주가 아닌 사택적덕의 딸이고
이 사택적덕의 딸이 639년 서탑에 사리봉안을 했다는 것
그러다 2016년에 국립전주박물관은 쌍릉에서 출토된 사람의 어금니를 조사했고
이것은 여성의 것이니 쌍릉의 주인은 왕이 될 수 없다고 발표
이로 인해 쌍릉의 주인도 선화공주인지 사택적덕의 딸인지가 쟁점으로 떠오른다.
쌍릉 - 대왕릉 출토 유골함, 유골 1
결국 미륵사의 창건과 쌍릉의 주인이 누구인지에 대한 논란을 잠재우기 위해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와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가 쌍릉 재발굴조사에 들어가기로 한다.
그리하여 2018년 3월에 재발굴을 시작, 그 결과 대왕릉에서 저 유골함과 유골들이 발견된다.
쌍릉 - 대왕릉 출토 유골함, 유골 2
그리고 2018년 7월 17일 학자들이 모여 조사한 최종결과가 발표
고고학, 역사학, 법의학, 유전학, 생화학, 암석학, 임산공학, 물리학 등
저 유골들을 연구한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두 모였다.
당시 발굴된 유골 중 등뼈 조각
<연구결과>
1) 유골들은 여러 사람의 것이 아니라 모두 한 사람의 것
2) 키는 161~170㎝ 정도로 당시에 비해 큰 편, 50-60대의 남성
3) 생전에 낙상한 결과 골반뼈에 골절이 생겨 후유증을 앓았다.
4) 늙어서는 * 광범위 특발성 뼈과다증 에 걸려 척추에 극심한 통증을 안고 살았다.
* DISH, Diffuse Idiopathic Skeletal Hyperostosis : 인대가 골화(뼈처럼 되는 현상)되는 희귀질병
이 병의 원인은 분명치 않으나 * 어패류를 장기간 다량 섭취한 결과로 생길 수 있다.
* 어패류는 고급요리에 사용되는 재료
5) 법의학자들 : 종전 연구에서 어금니를 여성의 것으로 본 주장에 반대
▶ 연령이 많은 점은 분명하지만 성별은 알 수 없다.
쌍릉 - 대왕릉
마지막으로 고고학과 역사학 전공자들이 가세하였다.
대왕릉의 규모는 왕릉급이 분명하며 그 왕릉 형성 연대는 7세기 전반 무렵으로 비정된다는 것
또한 대사찰과 왕릉 준공을 시행할 정도로 익산 지역을 중요시 하였다는 것
그리하여 전문가들은 모든 의견을 종합하게 되는데...
1. 7세기 전반에 사망한 큰 키의 50-60대 남성
2. 고급요리를 장기간 섭취한 결과 발생한 질병으로
극심한 통증을 호소하며 장기간 투병했던 병력
3. 대사찰과 왕릉을 준공할 정도로 익산을 중요시한
7C 전반의 백제 군주
단 한명밖에 없다.
2001 최응 作, 백제 무왕 표준영정
익산 쌍릉의 진짜 주인은 선화공주도 사택적덕의 딸도 아닌 바로 백제 무왕이였다
학자들은 1,300여 년 후 유골로 후손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무왕 앞에서 고개 숙여 예를 표했다.
다음날 오전 모든 언론에서 '백제 무왕의 무덤 확인' 이란 제목의 기사가 일제히 보도되기 시작했고,
이 사건은 2018년도 고고학-고대사 연구의 최대 성과로 평가되었다.
한 박물관의 억지 주장이 화근이 되어 시작된 무덤의 피장자 논쟁
이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 무덤을 재발굴 하던 중 유골함과 유골들이 발견되었고,
그 유골들을 확인한 결과 백제 무왕이었음이 증명되었다.
즉, 1971년 발견된 무령왕릉에 이은 두번째 백제 왕릉의 발견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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