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경기도 구리시 소재, 일설에 다르면 조선의 태조 이성계는 태종 이방원에게 자신의 사후, 자신을 고향인 함흥 땅에 묻어 달라고 유언했지만 태종 이방원은 어찌되었든 개국 시조인 부왕을 수도인 한양에 가까이 모셔야만 자기의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으므로 태조 이성계의 왕릉을 한양 근처에 모시고자 했다. 한편으로 태종 이방원은 태조 이성계의 유언도 지키기 위해서 결국 함흥의 흙들과 억새를 가져다가 한양 인근에 건원릉을 단장했다고 전한다.
* 관리가 안돼서 저런 게 아니다. 억새를 실수로라도 날려버리는 순간고인의 유언을 어기는 게 되어버려서 그런거다.
고려 태조 왕건의 '현릉'
북한 개성특별시 해선리 소재, 태조 왕건과 즉위 전부터 아내였던 신혜왕후 유씨와의 합장릉이다. 북한의 국보 제 179호이며 유네스코 세계유산 개성 역사유적지구로 등재되었다. 현재 태조 왕건의 현릉은 북한의 개건 작업으로 단장된 모습이며, 봉분의 크기도 창업군주인 만큼 다른 고려 왕릉에 비해서 확연히 큰 모습을 보여준다. 무덤에서 벽화가 그려졌던 점, 부장품으로 전신 청동상이 출토되었다는 사실에서 보자면 고려 태조 왕건의 왕릉은 고구려 문화를 이어받은 흔적이 많다.
가야 수로왕 김수로의 '수로왕릉'
대한민국 경상도 김해시 소재, 가락국(금관가야)의 시조이자 김해 김씨의 시조로 알려진 수로왕의 무덤으로 납릉(納陵)이라고 부른다. 『세종실록』 에서도 선조대 왕릉으로 특별 관리를 받았던 기록들이 보인다. 1580년(선조 13)에 수로왕의 후손인 허수가 수로왕비릉과 더불어 크게 정비하여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峰類洩)』 에 따르면 수로왕릉이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게 도굴을 당하여 내부가 드러났는데, 순장된 여자 시신 두 구가 있었다고 한다. 기록을 신뢰한다면 수로왕릉은 석실묘였던 셈이다.
고구려 동명성왕 고주몽의 '동명왕릉'
북한 평양직할시 력포구역 룡산리 소재, 알려진 걸로는 장수왕의 평양 천도 이후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의 왕릉을 도읍 인근에 이장했다고 하지만... 근거는 확실한 게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규모상 예전부터 고구려의 왕릉으로 인식되어 조선 왕실에도 제사받은 기록이 존재하고, 무덤 자체도 5-6 세기 고구려의 고분 형태인 것은 확실하기에 고구려 고분군의 자격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선정되었다. 현재 모습은 북한의 개건 작업으로 왕릉이 원래 모습에 비해 확장된 모습
그렇다고 전 해는 음울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고려 전역을 불바다로 만들고, 사람들의 생활을 지옥으로 이끌고 있던 왜구의 침입은 이미 수십년째 이어지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1376년, 최영은 노구를 이끌고 '홍산전투' 에서 왜구를 상대로 악전고투하며 승리를 거두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적의 기세는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습니다.
76년 10월, 왜구는 매복작전을 펼치던 고려군의 계획을 알아차려 오히려 역공을 퍼붓어 고려군을 패퇴시켰습니다. 11월, 경남 거제로 침입해온 왜구들은 함안(咸安)ㆍ동래(東萊)ㆍ양주(梁州)ㆍ언양(彦陽)ㆍ기장(機張)ㆍ고성(固城)ㆍ영성(永善)를 모두 불바다로 만들어버렸습니다. 12월, 경상남도 합포의 고려군영이 왜구의 침입으로 불타올랐습니다.
당시 원수로 있던 인물은 김진(金縝)이라는 사람이었는데, 그는 적을 막기는 커녕 늘 얼굴이 반반한 기생을 뽑아 군중에서 주색잡기만을 할 뿐이었습니다. 그는 늘 '소주' 를 마시고 취해 휘하 군졸들에게 극도의 모욕을 가하기 일쑤였는데, 왜구가 쳐들어오자 병사들은 "원수의 '소주패' 를 내보내 적을 막으라. 우리는 싸울 생각이 없다." 며 태업 행위를 벌였고, 이로 인해 의창(義昌)ㆍ회원(會原)ㆍ함안ㆍ진해ㆍ고성ㆍ반성(班城)ㆍ동평(東平)ㆍ동래ㆍ기장 등은 제대로 된 싸움조차 해보지 못하고 모두 노략질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연간 왜구의 침입 숫자 와 마쓰라토(松浦黨) 中 ─ 이영
끊도 없는 왜구의 숫자, 갈수록 강력해지는 적의 군세, 지방 장수들의 한심할 정도의 무능, 부패. 이 모든 악재가 혼재하는 상황 속에서 1377년의 해는 비틀거리듯 한반도에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그 첫 해가 지기도 전에 왜구의 공세가 시작되었습니다.
경남 합포 지역 지도. 훗날 이순신이 이곳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했습니다.
77년 1월, 왜구는 다시 한번 합포의 고려군영을 향해 쳐들어왔습니다.
합포는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다시피, 일본 본토나 대마도 등에서 바다를 건너온 왜구가 남해를 거쳐 서해안으로 가기 위한 관문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수십년 왜구의 침입 동안 셀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침입을 받았고 헤아리기도 힘든 수준으로 피해를 받았습니다. 1374년에는 합포의 고려군영이 습격 당해 무려 5,000여명이 전사하는 상상을 초월하는 피해를 입은 적도 있었습니다.
물론 고려군도 바보가 아닙니다. 적이 셀수도 없을 만큼 쳐들어왔으니, 그만큼 대비를 하고 있었을 겁니다.
그러자 왜구는 합포의 고려군과 직접 맞대결을 펼치는 대신, 회원창(會原倉)을 털어갔습니다. 회원창은 달리 석두창(石頭倉)이라고 했는데, 경상도 동남부지방의 세곡을 수납하여, 남해안·서해안의 해로를 이용, 예성강 입구의 경창(京倉)에 납부하는, 고려 13조창(漕倉) 중 하나였습니다.
즉 경상도의 세곡을 보관한 곳이었고, 조정의 재정을 담당하는 곳이자 병사들의 군량을 담당하는 곳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곳이 적에게 약탈 당한 것입니다. 분명히 고려군은 자국에서 싸우고 있고, 왜구는 바다를 건너 쳐들어오고 있지만, 고려군은 자기 땅에서 식량이 부족해 굶주리고 왜구는 적의 땅에서 배불리 먹으며 싸우고 있었습니다.
내륙으로 끝없이 진군하는 왜구
2월, 왜구는 신평현(新平縣)을 공격했습니다. 신평현은 오늘날의 충남 홍주에 해당합니다. 이 곳을 침공한 왜구는 양광도 도순무사였던 홍인계(洪仁桂)에게 패퇴 당해, 홍주를 휩쓰는 것은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침공이 저지되었다고 하면, 적이 다시 바다로 물러난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그렇지 않았습니다. 홍주에서 저지 당한 왜구는 오히려 더욱 더 고려 내륙을 향해 진군했고, 경양(慶陽)을 쳤습니다. 경양은 오늘날의 충남 천안 시 입니다. 오늘날 충청남도 최대의 도시도 왜구에게 유린 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왜구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급기야 평택현(平澤縣)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평택은 말할것도 없이 오늘날의 경기도 평택시입니다. 양광도 부원수였던 인해(印海)가 적을 막기 위해 나섰으나 되려 적에게 패배했고, 이 지역은 송두리째 적에게 불타오르고 백성들은 도륙되었습니다.
3월, 왜구는 다시 한번 서해의 바다에서부터 침공해왔습니다.
왜구의 군대는 강화도를 공격했는데, 강화도는 왜구의 공세 때 가장 많이 적에게 공격을 당한 지역 중 하나로써, 그때그때 고려군이 다시 회복하곤 했지만 중간중간 바다를 건너온 왜구들이란 왜구는 다 모여있는 '왜구 소굴' 로 변모하기 일쑤였습니다.
이때의 침공 당시, '고려사 최영전' 의 기록에 따르면 강화도에는 큰 전함 50여척과 전투병 1천여명이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 왜구가 쳐들어오자 만호 김지서(金之瑞), 부사 곽언룡(郭彦龍) 등은 싸움조차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허겁지겁 강화도에 있는 마니산으로 도망쳤습니다. 이 과정에서 김지서의 부인이 왜구에게 납치 되었고, 왜구에게 강간 당하지 않으려고 도망치던 처녀들 여러명이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마니산. 당시 산으로 피했던 사람들은 이 위치에서 저 아래의 마을, 밭이 불타오르고 노략질 당하는 광경을 지켜봤을듯 합니다.
한반도 본토와 코앞인 강화도가 불타오르고 있을때, 강화도와 내륙 사이를 잇는 착량(窄梁) 어귀에는 50여척의 고려 수군이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담당하는 장수의 이름은 손광유(孫光裕) 였습니다.
당시 고려의 군사 작전을 주재하던 최영은, 애초에 손광유에게 단단히 일러 둔 참이었습니다. "절대로 착량 어귀에서 벗어나지 말라. 해당 근처에서 주둔하며 적에게 위엄만 보이며 공격을 방지하는 역할만을 하라. 큰 바다로 나가지 말아라." 고 말입니다.
당시는 최무선의 화포가 전투에 실전배치 되기 이전이었고, 고려 수군은 왜구와의 수차례 대결에서 끊임없이 졸전을 거듭하는 형국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인천 앞바다는 조금의 과장도 없이 '왜구의 소굴' 이었습니다. 이미 재해권을 모조리 상실한 고려 수군의 상황을 생각하면, 큰 바다로 나가서 왜구와 대결하는것은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최영의 신신당부에도 불구하고, 손광유는 착량 어귀에서 빠져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상태로 술을 잔뜩 마시고 곯아 떨어졌고, 그대로 날이 점점 저물기 시작할 즈음 왜구의 공세가 시작되었습니다.
바다가 낮같이 밝았다. 죽은 사람이 천여 명이 넘었다.(海明如晝 死者千餘人) - 고려사 최영전
고려군의 함선 50여척은 밤의 해안에서 모조리 불타올랐습니다. 제대로 저항조차 해보지 못한 상태에서 전사자는 무려 천여명을 넘어가는 수준이었습니다. 착량에서 압도적인 대승리를 거둔 왜구는 이제 내륙으로 진입하기 시작했습니다. 현재의 김포 지역인 수안현(守安縣)·통진현(通津縣)·동성현(童城縣) 등이 모두 왜구의 노략질에 처참하게 황폐화 되었습니다.
적은 이에 강화를 버리고 물러나서 수안현(守安縣)·통진현(通津縣)·동성현(童城縣) 등지를 노략질하였으니, 지나가는 곳마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 고려사절요 1377년
(왜구들이 떠들어대길)"막는 사람이라고는 하나도 없으니 이 땅이야말로 참으로 낙원이 따로 없구나!" (無人呵禁, 誠樂土也)
당시 환갑의 나이였던 최영은 경복흥, 이인임 등과 함께 현장에 나와 본영을 꾸리고 작전을 짜다가, 참담한 상황을 생각하자 슬픔과 분을 참지 못하고 급기야 눈물을 흘렸습니다.
지난 반세기 동안 고려를 위해 싸워왔고, 바로 직전해에 화살이 입술을 맞혀도 분투했던 무장조차도 쏟아오르는 분노와 풀 수 없는 무력감에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시각, 같이 왔던 다른 장군 석문성(石文成)은 "노래 잘하는 기생은 어디에 있는가" 하고 찾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강화도를 장악하고, 인천 앞바다를 통해 수도권을 바로 코앞에서 위협하는 왜구를 막기 위해 조정 최고 대신들이 전장에 나와 있을때, 남쪽에서부터 새로운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가히 절망적인 이야기 였습니다.
慶尙道元帥禹仁烈報 경상도 원수 우인열이 보고하기를 "倭賊自對馬島蔽海而來 帆穡相望 已遣兵分守要衝然 賊勢方張 防戍處多 以一道兵分軍而守 勢甚孤弱 請遣助戰元帥 以備要害""왜적이 대마도로부터 바다를 덮어 와서 돛과 돛대가 서로 이어질 정도입니다. 이미 군사를 보내어 요해처를 나누어 지켰으나 적이 형세가 성대하고 방어할 곳이 많아서 한 도의 군사로써 나누어 지키기에는 형세가 심히 위태롭고 약하니 조전원수를 보내어 요해처를 방비하게 하소서." 하였다. 時江華之賊 逼近京都國家備禦不暇 又得此報 罔知所爲 이때에 강화에 있는 왜적이 서울에 아주 가까이 밀어닥쳐서 국가에서 방비하기에 겨를이 없는데, 또 이 보고를 받자 어찌 할 바를 몰랐다.
4월, 경상도 원수 우인열은 절망 그 자체에 가까운 보고를 올렸습니다. 대마도에서부터 바다를 뒤덮는 수준의 왜구 함선이 출동했으며, 곧 경상도 지역에 도착하기 직전이라는 이야기였습니다. 경상도 지역에도 어느정도 병력은 있지만, 이 정도의 대규모 병력을 상대한 전력으론 어림없었습니다. 때문에 지원을 요청하는 보고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강화도의 왜구들이 다름아닌 수도를 노리고 있었던 상황입니다. 본래 현장 지휘는 은퇴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최영을 비롯해 경복흥, 이인임 등의 최고 대신들 마저 갑옷을 입고 전장에 나와 대비를 하고 있던 참이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남쪽으로 보낼 군사는 없었습니다.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상황에서 고려의 지도부는 그야말로 패닉 상태에 빠졌습니다.
결국 아무런 대비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바다를 뒤덮는' 왜구 함선은 현재의 울산인 울주 지역에 상륙했습니다. 병력이 터무니 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우인열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최대한 시간을 끄는' 방법 밖에 없었습니다. 우인열은 울산에서 소규모 전투를 치뤘으나 패배했고, 밀양까지 밀려난 뒤에 다시 싸웠지만 또 패배해서 휘하의 최방우(崔方雨) 등이 전사했습니다. 다시 현재의 창녕 부근까지 밀려와서 또 전투를 치뤘으나 여전히 힘겨웠습니다.
우인열은 전투에서 얻은 말이나 보물이 있으면 이를 사졸들에게 전부 나눠주면서 독려했고 최대한 시간을 끌었습니다. 그러나 이쪽이 적군 십여명에서 수십명을 죽일때 아군이 수십여명이 죽어나간다치면, 우리군은 숫자가 빠르게 줄어드는데 적군은 언발에 오줌누기 수준으로 티도 안나는 정도의 압도적인 전력차라 도저히 대응할 수가 없었습니다.
한번 겨우겨우 전투를 치룰때마다 쭉쭉 내륙으로 밀려나갔고, 왜구는 그 상태에서 다시 병력을 나눠 일부는 전라도와 경상도 경계 지역으로 가는 한편, 다른 일부는 경주 지역 등 경상도 내부를 휘저었습니다. 당연하게도 셀수도 없는 지역이 노략질 당했고, 셀수도 없는 사람들이 도륙 당했습니다.
그러나 최영의 주력군은 여전히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경상도 지역의 왜구가 점점 내륙으로 들어오는 동안, 강화도 지역의 왜구도 점점 더 내륙으로 들어왔기에 서강(西江) 지역에서 전투를 펼쳐 적을 몰아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왜적이 여미현(餘美縣)을 침범하였다.(倭寇餘美縣)
고려의 주력군이 강화도 - 김포 주변에서 왜구와 대치하며 전투를 펼칠 무렵, 자연히 약화된 한반도의 허리쪽으로 다시 한번 왜구들이 들어왔습니다. 현재의 서산 지역으로 왜구가 쳐들어왔던 것입니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왕안덕(王安德)을 장수로 파견해 어떻게든 이를 저지해보려 했습니다. 왕안덕은 몇차례 소규모 승리를 거뒀지만, 이번에도 이전과 마찬가지로 왜구는 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다로 돌아가기는 커녕, 오히려 더욱 더 내지로 이동했습니다. 현재의 서산 지역을 거쳐 당진 지역으로, 이후에는 천안 지역으로, 이후에는 경기도 안성까지...
그리고 그럴수록 오히려 더 군세도 늘어났습니다. 분명 처음 서산에서만 해도 왕안덕이 공격해서 쉽게 물리쳤던 왜구들이, 안성 부근에까지 이르자 적의 군세가 너무도 강대해져 왕안덕은 도저히 더 진군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습니다.
수원(水原)에서 양성(陽城)·안성(安城)까지의 고을들은 모두 인적을 볼 수 없는 폐허가 되어버렸다. - 고려사 왕안덕전
이렇게 제대로 전투를 치룰 수 없는 상황 동안, 수원 ~ 안성 지역 등은 왜구에게 모조리 초토화 되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정보도 얻을 수 있었는데, 왜구의 이 공격은 강화도의 왜구와 같이 펼쳐는 양동작전으로, 최영이 이끄는 주력군이 충청도와 경기남부로 남하하면 그 틈에 수도 개경을 함락시키려는 대전략이었다는 것이 포로의 입에서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충청도에서 경기남부로 군사를 보내는 것만 해도 불가능한 상황이었으니, 저 멀리 경상도 지역에 보낼 군세 따위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굳이 경상도 뿐만이 아니라, 이미 전국토가 불타오르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왜적이 강화로부터 양광도 바닷가의 고을들을 쳐서 함락시켰다. 이전에 적선이 겨우 22척이었는데 우리 전함을 빼앗은 것이 많아 50척이나 되었다. (倭自江華攻陷楊廣道濱海州郡 初賊船僅二十二艘 奪我戰艦 多至五十艘)
강화도 부근에서 왜구와 고려군의 대치가 이어지는 동안, 강화도의 왜구들은 일부 병력을 따로 추려 함선에 태워 충청도 - 경기남부 지역의 해안가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모조리 초토화 시켰습니다.
비슷한 무렵, 왜선 50여척이 새롭게 나타나 다시 한번 강화도를 불태워버리고 부사 김인귀를 죽였으며, 무려 수졸(戍卒) 천여명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열명이나 백명도 아니고 천명이나 되는 병사를 포로로 잡아갔으니 어마어마한 일이었습니다.
왜적이 신주(信州)ㆍ옹진(甕津)ㆍ문화(文化) 등 현을 침범하니 원수 조인벽ㆍ나세ㆍ심덕부가 적과 싸워 이기지 못하고 군사를 더 보내 주기를 청하였다. (倭寇信州甕津文化等縣元帥趙仁璧羅世沈德符與戰不克 請濟師)
그 해 6월, 왜구는 좀 더 북상하더니 황해도로 쳐들어왔습니다. 왜구는 옹진, 신천 등을 공격했고 이에 조인벽, 나세 심덕부 등이 적과 맞서싸웠으나 패배, 조정에 지원병을 요청했습니다.
같은 시기, 남해안에서 왜구들이 전라남도 순천지역으로 침입, 낙안까지 침공했습니다. 이에 장군 정지가 나서 적과 교전을 펼쳐, 겨우 적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황해남도를 거친 왜구들은 9월 경 현 황해북도 지역까지 이동해, 평산 지역을 공격합니다.
왜적 2백여 척이 제주를 침범하고 또 영강(永康)ㆍ장연(長淵)ㆍ풍주(豐州)ㆍ안악(安岳)ㆍ함종(咸從)ㆍ삼화(三和)ㆍ강서(江西) 등 현을 침범하였다. (倭賊二百餘艘 寇濟州 又寇永康長淵豐州安岳咸從三和江西等縣)
또한 이 무렵 200여척의 왜구 함선이 제주를 침범했고, 수 많은 지역을 유린했습니다.
1377년 3월 ~ 9월 경까지의 상황을 아주 대략적으로 간략하게 표시한 그림. 실제로는 훨씬 많은 지역이 왜구의 침공을 받았습니다.
막으려고 해도 어디를 막아야 할지 모릅니다. 지원군을 보내려고 해도 어디를 먼저 보내야 할지 모릅니다. 그야말로 재앙이었습니다. 이 당시 고려 조정에서는 진지하게 '수도 천도 논의' 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수도 천도가 가당치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조차도 분위기에 말려들어 감히 반대를 못하는 것을, 오직 최영 한 사람만이 적극적으로 나서 간신히 저지시켰을 뿐입니다.
그래도 이 상태에서 가장 위급한 지역을 꼽자면, 바로 경상도 지역이었습니다. 충청도 등을 치는 왜구등은 강화도의 왜구와 한패라고 보면 될테니, 여기를 막아서 쫒아낼 수 있다면 일단 물러나게 할 수 있습니다. 전라도에선 정지가 제법 성공적인 저항을 펼쳤습니다. 황해도에서는 패전을 하는등 전황이 어두웠지만 나세 등이 군사를 이끌고 어떻게든 대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경상도에서는 압도적인 적의 전력에 우인열 등이 계속해서 밀리고만 있었을 뿐입니다.
경상도 지역의 왜구 침공은 3월에 시작되었는데, 우인연을 달이 넘도록 필사의 저항을 펼치며 적의 발목을 잡으면서 시간을 끌었습니다. 고려 조정에선 무려 두달이 걸린 끝에 겨우 경상도로 보낼 군사를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군사를 이끄는 장군은,
바로 이성계 였습니다.
이때 동원된 병력은 이성계 개인의 '친병' 이 다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때를 다룬 '고려사 우인열전' 을 보면,
'우리 태조가 평소 인심을 얻었고 군사들도 정예병이었으므로 싸울 때마다 승리하니 각 고을에서 가뭄에 비구름을 바라보듯 태조를 앙망했다.'
인심을 얻었다는 부분 등은 조선 태조를 추켜세우는 묘사라고 쳐도, '태조의 군사들이 정예병이어서' 같은 이야기는 이성계가 고려 조정에서 병사를 받아서 거느리고 갔다면, 굳이 나올 필요가 없는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뒤이어 나오지만 이때 불과 20세였던 훗날의 정종 이방과가 이성계와 같이 이 전투에 같이 참전하기도 했던 것을 보면, 당시 조정에서 병력을 따로 내기 어려운 상황에서 이성계의 친병 위주로 구성된 병사를 이 전투에 투입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성계가 출전하는 무렵에는 그때까지 끈덕지게 버티던 우인열도 완전히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라, 쉴새없이 끊임없이 비보(飛報)를 올렸고 이에 이성계도 밤낮으로 말을 달려 남부로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이성계가 현장에 도착했을 무렵, 대마도에서 울산을 거쳐 움직였던 왜구들은 이제 지리산까지 도달한 상태였습니다.
양군은 지리산 아래쪽에서 2백여 보(步) 거리를 두고 대치했습니다. 이때, 왜구 중에 한 명이 도발을 하려는 생각이었는지 갑자기 궁뎅이를 내밀고 두들기면서 욕설을 해대자, 격분한 이성계는 그 자리에서 편전을 꺼내 화살을 쏘아 도발하던 왜구의 엉덩이에 적중시켰습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왜구가 당황할때, 이성계군은 공격을 시작했고 적을 한번 밀어붙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초반에 밀렸다곤 해도 적의 숫자는 여전히 많았는데, 적군은 기세를 내주자 지리산 쪽으로 몸을 피해 높은 산쪽에 진을 차렸습니다.
'적의 무리가 낭패를 당하여 산에 올라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에 임(臨)하여 칼과 창을 고슴도치털처럼 드리우고 있으니, 관군(官軍)이 올라갈 수가 없었다' - 조선왕조실록 태조총서
이때 이성계는 먼저 자신은 산아래에 머물고 휘하의 비장을 시켜 적을 물리치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잠시 상황을 보고 온 비장은 "바위가 높고 가팔라서 도저히 말이 올라갈 수가 없다." 며 공격이 불가능하다고 전했습니다. 이성계 휘하의 친병이라면 주로 기병 전력으로 구성되어 있을테니, 산악전은 여러모로 껄끄러웠던 것입니다.
그러자 이성계는 비장을 한번 꾸짖고는, 이번에는 자신을 따라온 아들 이방과에게 부하들 중에서도 특별히 용맹한 부하를 붙여서 적을 살펴보게 했는데, 이방과 역시 돌아와서는 비장과 마찬가지로 "어려워 보인다" 는 의사를 전했습니다.
화가 난 이성계는 "그렇다면야 내가 직접 가겠다!" 며 자기가 대장으로 나서서, 산악지대고 뭐고 앞뒤 가리지 않고 적의 방진에 그야말로 탱크처럼 기병을 이끌고 막무가내로 돌진하니적 왜구 중에 절반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절벽에서 떨어져서 죽어나갔다고 합니다. 작전이고 뭐고 할것도 없이 휘하 친병들의 전투력으로 막무가내로 왜구를 문자 그대로 갈아버린 셈입니다.
이렇게 장장 2개월 간 경상도 전지역을 초토화시킨 왜구를 한방에 전멸시키고 귀환한 이성계는, 곧이어 또다시 출동 명령을 받았습니다. 지난 6월 무렵부터 계속해서 조정이 원군을 청하는 황해도의 나세, 심덕부 등이 또다시 지원 요청을 절실히 조정에 바라자 조정에서 이성계를 이 지역에 원군으로 파견했기 때문입니다.
한반도 최남부 즈음에서 전투를 펼친뒤 몇달 되지도 않아 다시 한반도 북부로 군대를 이끌고 북상한 이성계는 해주(海州)에서 펼쳐진 일대 회전에서 왜구를 크게 쳐부수는데 성공합니다. 살아남은 왜구들은 험한 산세로 들어가 바리케이트를 치고 버텼습니다. 함부로 치고 올라가면 이쪽의 피해도 우려되는 판이었습니다.
헌데 이 상황에서 이성계는 이상한 행동을 취했습니다. 적이 눈 앞에 있는 상황에서 이성계는 말에서 내리더니, 그대로 호상(胡床)에 나지막히 걸터 앉고는, 얼토당토 않은 명령을 내린 것입니다.
"풍악을 올려라!"
적군이 눈 앞에 있는데 풍악이라니?
이해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시키는 일이니 아랫 사람들은 서둘러 음악을 연주하며 분위기를 만들었습니다. 이성계는 여기에 더해 당시 군대를 따라왔던 신조라는 중 한 명을 옆 자리에 앉히고 술자리를 베풀었습니다. 이에 신조는 직접 고기를 썰어 이성계에게 주었고, 술을 따라 주었습니다.
저 험한 지역에 틀어박혀 살기등등하게 이쪽을 노려보는 왜구와 여기에 대치하는 고려군, 그 앞에서 중과 함께 술을 마시는 이성계는 한동안 묘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습니다. 한참 그렇게 신조와 술을 마시던 이성계는 의자에 앉아 있던 상태로 병사들에게 이르기를,
"불을 질러 버려라!"
이성계의 말에 병사들은 그 부근에 불을 질러버렸고, 섶을 바리케이트로 삼고 있던 왜구들은 불이 옮겨 붙자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적을 막기 위한 험한 요충지도, 이렇게 되고 보니 한데 모여 화공에 당하기 쉽게 구석에 몰린 것에 지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왜구들은 그대로 불에 타서 죽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불과 수백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펼쳐지던 정 반대의 광경.
수십, 수백의 왜구들이 불에 타서 죽어가는 지옥같은 상황이 된 가운데서도, 이성계는 가만히 앉아서 신조와 담소하고 술하고 고기만 먹을 뿐이었습니다. 결국 이대로 있다간 어차피 다 죽을 판이었던 왜구들은 죽자사자라는 각오로 바리케이트를 포기하고 고려군이 몰려있는 곳으로 달려오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고려군에게 유리한 환경만 만들어주었을 뿐이었습니다. 왜구들이 요충지에 틀어박혔을때는 함부로 공격하기 어려웠던 고려군이었지만, 적군이 요충지에서 스스로 나오게 되자 어렵지 않게 왜구를 사방에서 공격하여 없앴을 수 있었습니다.
뒤에서는 불에 타 죽고, 앞에서는 고려군에게 죽어 나니 왜구들은 거의 지옥에 들어온 셈이었습니다. 하지만 죽을 지경이 되자 왜구들은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필사적으로 고려군을 돌파하기 위해 안간힘을 썻는데, 그 와중에 쏜 화살 세레 중 하나가 군대의 후미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이성계에게까지 날아왔습니다.
이 화살은 이성계 코 앞까지 떨어져, 술자리에 있던 술병을 그대로 깨부셨습니다. 모두가 아연실색했찌만, 이성계는 편안히 앉아 있는 상태로 계속 술을 마시며 명령을 내렸습니다.
"김사훈(金思訓)·노현수(魯玄受)·이만중(李萬中) 등은 남은 적들을 모두 소탕하라!"
그렇게 왜구들은 전방의 고려군에게 갇힌채 불에 타죽어가며 처참한 비명만을 내질렀고, 그 앞에서 고려군이 뛰쳐나오는 왜구들을 무참하게 찔러 죽이며 도륙하는 가운데, 그런 고려군의 지근거리 뒤, 죽어가는 비명은 물론이거니와 화살도 닿을 거리에서 그 지옥같은 광경을 느긋하게 구경하며 술과 고기를 마시던 이성계는 앉아서 왜구를 무찌르는 공을 세웠습니다.
餘賊阻險, 積柴自固。 太祖下馬, 據胡床張樂, 僧神照割肉進酒, 命士卒焚柴, 烟焰漲天。 賊勢窮出, 死力衝突, 矢中座前缾。 太祖安坐不起, 命金思訓、魯玄受、李萬中等, 擊之幾殲。 時倭賊擄國人, 必問: “李 【太祖舊諱】 萬戶, 今在何處乎?” 不敢近太祖之軍, 必伺間乃入寇。 남은 적군들은 험지(險地)에 의거하여 섶[柴]을 쌓아 스스로 튼튼하게 하였다. 태조는 말에서 내려 호상(胡床)에 걸터앉아 음악을 베풀게 하니, 중[僧]신조(神照)가 고기를 베어 술을 올렸다. 태조는 사졸들에게 명하여 섶을 불지르게 하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가득찼다. 적군이 곤경(困境)에 빠져서 죽을 힘을 내어 충돌(衝突)하였다. 화살이 자리 앞에 있는 술병에 맞았으나, 태조는 편안히 앉아서 일어나지 아니하고, 김사훈(金思訓)·노현수(魯玄受)·이만중(李萬中) 등에게 명하여 이들을 쳐서 거의 다 죽였다. 이때 왜적이 우리 나라 사람을 사로잡으면 반드시 이성계(李成桂) 만호(萬戶)가 지금 어느 곳에 있는가를 묻고, 감히 태조의 군사에게는 가까이 오지 못하고 반드시 틈을 엿보고서야 들어와 침구(侵寇)하였다.
이렇게 되어 6월부터 8월경까지 황해남도-북도 지역을 초토화 시키고 조인벽, 나세, 심덕부, 임견미, 변안열, 유만수 등 6명 이상의 장수를 투입하고도 해결이 안되던 황해도 지역의 왜구를 이성계는 한번에 때려부수는 성과를 이뤄냅니다.
물론 이런 활약에도 왜구는 한번에 소탕되지 않았고, 바로 9월 경에 전남 영광, 함평, 전북 고창, 황해북도, 경상남도 등을 계속해서 공격해왔고 11월 경에는 130여척의 함선이 김해를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왜구의 공세가 연초부터 연말까지 끊임없이 이어지는 가운데, 정말 지독한 해였던 1377년은 겨우겨우 끝나게 됩니다.
이 1377년은 침투한 왜구의 숫자만 따지면, 최대의 격전인 진포-황산 전투가 있었던 1380년보다도 더 많았던, 역사상 가장 많은 왜구의 침공이 있었던 해였습니다. 그야말로 끔찍한 한 해였는데, 그러나 새 해가 된 1378년, 고려는 다시 한번 국가 존망의 위기에 직면하게 됩니다.
1378년 4월, 왜구는 다시 한번 강화도와 인천을 잇는 착량 어귀에 대규모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리고 "장차 개경을 칠 것이다." 라고 선언했습니다. 그간 왜구가 수도권 지역에 압박을 가한 적은 자주 있었지만, 직접적으로 "고려의 수도를 함락시켜버리겠다." 고 선언한 적은 이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이에 당연하게도 개경이 진동했고, 최영 등은 급박한 상황에서 당시 동원할 수 있었던 최대한의 병사들을 이끌고 나가 개경 근처 해풍 지역에 부대를 주둔 시켰습니다. 다만, 적이 어느쪽으로 올지 확실하지 않은 만큼 전군단을 한 곳에 집결시키진 못했는데, 왜구는 바로 이 점을 노렸습니다.
적이 정탐하여 알고 생각하기를, “최영의 군사만 깨뜨리면 경성을 엿볼 수 있다." 하여, 우리 군사가 주둔한 여러 곳을 그대로 지나쳐서, 서로 겨루지 않고 해풍으로 달려들어 곧장 중군(中軍)으로 향하였다. - 고려사절요
왜구는 정탐 끝에 고려군의 배치를 대략적으로 파악하고, "최영이 이끄는 중군만 쳐부수면 개경으로 가는 길이 열린다. 다른 부대와 싸울 것 없이 최영군단만 치면 된다." 는 생각으로 재빨리 기동전을 펼쳐, 여기저기에 배치되어 있던 고려군을 모두 무시하고 최영이 이끄는 중군으로 달려들었습니다.
1375년, 최영이 홍산 전투에서 왜구를 무찔렀을 당시에는 최영 외에 그 부장으로 양광도 도순문사 최공철(崔公哲), 조전원수(助戰元帥) 강영(康永), 병마사 박수년(朴壽年) 등 여러 장수들이 기록에서 언급됩니다. 그런데 이 '해풍 전투' 당시에는 최영의 부장으로 언급되는 인물이 문하 찬성사 양백연(楊伯淵) 한 사람 뿐입니다. 홍산 전투는 개경과 어느정도 거리가 있던 충청도 지역에서 펼쳐진 전투고, 이 해풍 전투는 수도 바로 코 앞에서 펼쳐지는 전투니 위급함, 중요성을 따지면 훨씬 더 높은데도 말입니다.
그 말인즉슨, 왜구의 갑작스런 기동전 탓에 준비가 덜 된 상태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보통 이런 상황이라면 일단은 한번 물러나면서 적의 공격을 피하고, 흩어져 있는 부대를 모아 싸워야 합니다. 그런데 전투가 펼쳐진 해풍은 현 개풍군 지역으로, 개경과는 고작 15km 정도 거리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군대를 모으고 수습하기 위해서 물러난다면, 개경이 바로 함락 당할 수 있는 상황이었던 겁니다.
때문에 최영과 양백연은 열악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철수조차 할 수 없는 상태로, 몰려드는 왜구를 상대로 맞서 싸워야만 했습니다. 이 당시는 조금의 과장도 없이 나라의 존망이 걸린 상황이었습니다. 최영조차도 전투에 앞서 이렇게 말했을 정도입니다.
"사직의 존망이 이 한번의 싸움으로 인하여 걸정된다(社稷存亡 決此一戰)."
그리하여 결국 피할 수 없는 싸움이 펼쳐졌는데, 처음부터 불리한 싸움이었습니다. 살기 등등하게 몰려오는 왜구에 비해 최영, 양백연이 이끄는 부대의 숫자는 많지 않았기에 열심히 싸워 봤지만 결국 밀리기 시작했고, 마침내 고려의 수호신 최영이 이끄는 부대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최영이 용맹무쌍하고 적과 맞서 싸워 물러날 줄 모른다고 해도, 전투는 최영 한 사람만으로 할 수 있는게 아니라 군사를 가지고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군사들의 전열이 흐트러져 버리면 방법이 없습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최영은 후방으로 물러나면서 잠시 동안 전장에서 이탈했습니다. 지난 반세기 동안 고려를 지켜왔던 탑 하나가 무너져 내리려던 순간이었습니다.
최영이 전장에서 이탈함에 따라, 남아 있는 것은 소수의 부대를 이끌고 있던 문하 찬성사 양백연 한 사람 밖에 없었습니다. 양백연은 삼국지로 치자면 '여포' 같은 인물인데, 장수로서는 제법 능력도 있고 왜구를 상대로 혁혁한 전공을 세우기도 했지만, 여자 문제가 상당히 지저분했고 탐욕이 강하고 명색이 관군이면서 약탈을 즐겨 평판이 좋지 못한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장수로서는 분명 능력 있는 인물이긴 했습니다.
전장에서 최영과 최영이 이끄는 부대가 이탈함에 따라 양백연은 홀로 부대를 이끌고 적과 맞서 싸웠습니다. 하지만 조족지혈이었을 뿐입니다. 부대의 '대장' 이 퇴각한 판에 부장 혼자 싸워서 이길 수 있을리도 없었습니다. 이미 패배는 기정사실이었던 상황입니다. 기록이 간략해서 알기는 어렵지만 어쩌면, 도주하지 않은게 아니라 이미 적에게 완전히 말려들어 도주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전장과 코 앞인 개경에도 전투의 소식은 실시간으로 들려오고 있었기 때문에, '최영이 무너졌다" 는 말을 들은 우왕과 대신들은 경악해 곧바로 피난 준비에 착수했습니다. 이대로 왜구가 몰려오면, 개경은 무너진 것이나 다름없었을 겁니다.
왜구로부터 "최 만호만 피하면, 고려에는 두려울 상대가 없다." 는 말까지 듣던 최영이 무너졌습니다. 홀로 남은 양백연도 무너지기 직전이었습니다. 다른 고려군은 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도우러 오기엔 이미 너무 늦었습니다. 그리고 패배는 지척에 있었습니다. 개경이 함락되기 직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이성계가 나타났습니다.
최영이 퇴각하자, 태조(太祖)가 정예 기병을 거느리고 곧바로 나아가 양백연과 협공했다 - 고려사 최영전
고려군이 패배 직전으로 몰린 바로 그 순간, 이성계가 이끄는 정예 기마 부대(精騎)가 갑작스레 전장에 난입했습니다. 최영의 중군이 왜구와 맞서는 소식은 흩어져 있는 여러 부대에게 모두 전해졌을 테고, 개경이 위태로운 상황인데 가만히 있다면 말이 되지 않으니 필시 보고를 받은 부대들은 모두 구원하기 위해 달려오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왜구의 기동전이 워낙 재빠르고, 강력한 전력으로 몰아붙이는 싸움이 일방적으로 끝나고 있었기에 그 어떤 부대도 전장에 도착을 하지 못했습니다. 오직, 압도적인 주력을 가진 이성계의 정예 기마군을 제외하곤 말입니다.
이성계 군단 특유의 대라소리와 함께 전장에 난입한 정예 기마병은 양백연과 싸우고 있던 왜구를 그대로 옆에서부터 후려갈겼습니다. 눈 앞의 적만 신경쓰던 왜구들은 난데없는 기습을 당하고, 이성계의 부대와 양백연의 부대가 힘을 합치기 시작하자(合擊) 완전히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무렵, 잠시 물러나 있던 최영도 시간을 번 틈을 타 다시 부대를 수습했고, 재차 돌아와 전장에 난입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왜구는 1차로 이성계 군단에 측면을 내주고, 2차로 최영 부대에 얻어맞는 형국이 되어버렸습니다.
최영은 적군이 쓰러져 흔들림을 보고는 휘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서 곁에서 적군을 치니, 적군이 거의 다 죽었으며 남은 무리는 밤에 도망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태조총서
측면을 사정없이 후려맞은 왜구는 결국 전열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고, 처절하게 패퇴하기 시작했습니다. 왜구는 거의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으며, 남은 극소수의 왜구들만이 밤이 되자 가까스로 전장을 탈출하는데 성공했을 뿐입니다.
당시 피난 준비를 하고 있던 고려 조정에서도 뒤늦게 이 승리의 소식이 알려졌고, 비로소 개경의 비상령은 해제되어 피난 예정도 없었던 것이 되었습니다. 만일 전투에서 패배했다면 수도 함락은 확정적이었던 만큼, 이 승리는 그야말로 극적인 승리였습니다.
기적같은 해풍 전투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왜구와의 사투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다음 해인 1379년에는 보병 2천명, 기병 700명 총합 2,700명으로 이루어진 왜구의 대부대가 종횡무진 활보하다가 양백연이 이끄는 부대와 전투를 펼쳐 패배하기도 했고, 그 다음해인 1380년에는 함선 500척에 탄 역대 최대 규모의 왜구가 쳐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정말로 극적으로, 역사상 최대 규모의 왜구가 쳐들어온 바로 그 무렵에 최무선의 신무기, 화포가 고려군에 도입되어, 고려 수군은 왜구와의 전쟁에서 지난 수십년간 겪었던 굴욕사의 마침표를 찍고 진포 해전에서 대승리를 거두는 일대 전기를 마련합니다.
이 패배로 수많은 함선을 잃고 간신히 내지에 상륙한 왜구들은, 한반도 여기저기에서 약탈 중이던 여러 왜구들과 다시 합류하여 최대 규모를 이루고 내륙을 종횡무진 했으나, 이후 전북 남원 땅에서 그 유명한 '황산 전투' 에서 이성계가 이끄는 부대에게 대패, 일거에 소탕되며, 충정왕 2년인 1350년부터 1380년까지 이르는 대혼란을 어느정도 진정시키게 됩니다. 물론 그 이후에도 왜구의 침공 자체는 더 있었기 때문에 정지의 관음포 해전이라던지, 이성계의 함주 전투 등 여러 크고 작은 전투들은 더 있었지만, 대체적으로는 저 시기를 거쳐서 무시무시했던 기세가 확 꺾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