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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washingtonpost.com/made-by-history/2022/12/08/why-doesnt-argentina-have-more-black-players-world-cup/

 

Perspective | Why doesn’t Argentina have more Black players in the World Cup?

Argentina is far more diverse than many people realize — but the myth that it is a White nation has persisted.

www.washingtonpost.com

 

이번 2022 월드컵에서의 아르헨티나의 성공을 바라보며, 한 가지 질문이 여러 팬들 사이에서 흔히 나타났다. 왜 아르헨티나 국가대표팀은 많은 흑인 선수들을 보유하고 있지 않은가? 아르헨티나의 축구 국가대표팀은 브라질 같은 다른 남아메리카 국가들과는 극명히 대조적으로, 흑인 대표 선수들의 비율이 현저히 떨어진다.

 

 

이런 분석은 새로운 것은 아니다. 2014년, 분석가들은 월드컵 결승전에서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에 적어도 한 명 이상의 흑인 선수가 있던 반면 아르헨티나는 한 명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는 농담을 던졌다. 2010년 아르헨티나 정부의 인구 조사 통계에서는 흑인의 수가 국가의 1%에도 훨 못 미치는 149,493명으로 나타났다. 아르헨티나가 정말로 백인 국가임을 확인시켜준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거의 20만 명의 아프리카 노예들이 아르헨티나가 식민지였던 기간 동안 라 플라타 강 기슭에 상륙했었고, 18세기 말엽에는 인구의 3분의 1 가량이 흑인이었다. 이는 아르헨티나를 백인 국가로 생각하는 것은 부정확할 뿐 아니라, 아르헨티나의 자기 정체화 의 중심에 있는 “흑인 말살”의 긴 역사가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아르헨티나인들에게는 흑인 아르헨티나인들의 부재를 “설명”해주는 것으로 알려진 신화가 있다. 이 중 아마도 첫 번째이자 가장 유명한 신화는 흑인들이 19세기 내내 있었던 전쟁에서 “총알받이”로 사용되어 어마어마한 사망자를 내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아르헨티나 독립 전쟁(1810~1819) 동안, 노예들은 스페인 군대에 맞서기 위해 5년의 복무 이후 자유를 주겠다는 약속과 함께 징병되었다.

 

 

그러나 역사학자 조지 리드 앤드류스가 주장한 대로, 많은 이들이 전장에서 죽기보다는 그냥 버려지거나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을 선택했다. 1829년의 점호에서는 아프리카계 아르헨티나인 제4척후병부대에서 31명의 전사자와 802명의 탈영자가 발생햇음을 보여준다. 이들 중 일부는 훨씬 북쪽의 페루 리마로 재배치되었다. 일부가 죽거나 탈영한 동안, 다른 이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아르헨티나의 가장 유명한 도시인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인구조사 통계에서는, 1778년에서 1836년까지 아프리카 혈통의 인구는 두 배 이상 증가한 것이 드러났다.

 

 

다른 신화로는 19세기 전쟁이 야기한 흑인 남성의 높은 사망률로 인해 아르헨티나의 흑인 여성들이 유럽계 남성들과 가정을 꾸릴 수 밖에 없었고, 이로 인해 흑인의 “실종”이 일어났다는 것이 있다. 몇 세대 이상 걸친 인종 간 혼합이 신체적으로 더 밝고 하얀 피부의 인구들을 만들면서 피해를 준 것으로 생각된다. 이 이야기에서 흑인 여성들은 그들의 삶의 모든 면에 명령받은 강압적인 체제의 일부 피해자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더 최근의 연구들은 일부 아르헨티나의 흑인 여성들이 그들 스스로나 자식들을 위해 백인들에게 제공되는 혜택들을 얻기 위해 백인이나 아메리카 원주민으로 통하는 결정을 결연히 내렸다는 것을 밝혔다. 베르나벨라 안토니아 비야몬테와 같은 몇몇 흑인 여성들은 다양한 법적 정책의 이점을 이용하여 노예로 태어났으나 자유롭게, 그리고 백인 여성으로 인지된 채로 사망했다. 

 

아르헨티나 문화 내 흑인 대표성의 부족에 관한 다른 신화는 질병, 그 중 1871년의 황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일부는 많은 흑인 아르헨티나인들이 그들의 빈곤으로 인해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극심한 감염지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불가능했고 질병에 굴복했다고 주장한다. 이 이론 또한 황열병으로 인한 흑인 사망자 수가 다른 인구에 비해 높은 비율로 나타나지 않아 거짓으로 밝혀졌다.

 

아르헨티나의 흑인 “실종”에 대한 이러한 신화들은 아르헨티나의 가장 오래 지속되는 역사적 유산들 중 일부를 모호하게 했다. 

 

실제로 아르헨티나는 노예와 그들의 후손에서 이민자들까지 여러 세기 동안 수많은 흑인들의 고향이었다. 카보베르데인들 19세기의 포르투갈 여권을 갖고 아르헨티나로 이주하기 시작했고, 1930~40년대에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이 선원과 항만 근로자로의 취업을 위해 아르헨티나로 들어왔다. 

 

그러나 아르헨티나의 전 대통령 도밍고 파우스티노 사르미엔토(1868~1874 재임)와 같은 백인 아르헨티나인들의 리더들은 근대성을 백인성(Whiteness)과 동일시하였기 때문에 흑인(Blackness)성을 지우는 다른 서사를 만들었다. 사르미엔토는 아르헨티나의 “후진성”과 사르미엔토가 여긴 “문명화”의 필요성을 서술하는 <파쿤도: 문명과 야만>(1845년 저)이라는 책을 지었다. 그는 국가의 비전을 아프리카나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유산보다는 유럽의 유산과 더 강하게 공유한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아르헨티나는 1853년 국가의 대부분 지역에서, 그리고 1861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노예제를 폐지했다. 노예제의 역사를 뒤로 한 아르헨티나의 리더들은 유럽을 문명과 진보의 요람으로 보면서 근대화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들은 독일, 프랑스, 영국의 반열에 합류하기 위해선 흑인 인구를 신체적, 문화적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믿었다.

 

여러모로, 이것은 아르헨티만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백인화 과정은 브라질, 우루과이, 쿠바와 같은 라틴 아메리카 도처에서 시도되었다.

 

그러나 이 경우 아르헨티나의 유일한 차이점은, 이들은 백인 국가로써의 이미지 구축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1850년대, “통치하는 것은 인구다”라는 말로 알려진 정치 철학자이자 외교관 후나 바티스타 알베르디는 백인 이민을 장려하였다. 아르헨티나 대통령 후스토 호세 데 우르퀴자(1854~1860 재임)는 알베르디의 아이디어를 지지했고 이를 국가의 첫 헌법에 적용했다. 수정 헌법 25조에서는 “연방정부는 유럽 이민을 촉진해야 한다”고 명시되였다.

 

사실 사르미엔토 대통령은 19세기 말엽 “20년 뒤에는 흑인들을 보기 위해 브라질로 여행해야 할 것이다.”라고 발언했다. 그는 흑인 아르헨티나인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으나 국가는 그들을 오랫동안 인정하지 않을 것임을 시사한 것이다. 아르헨티나의 지형은 곧 변화했다. 1860~1914년 사이 4백만의 유럽 이민자들이 정부의 부름에 답하여 이민을 왔고, 이 조항은 오늘날 아르헨티나의 조항에도 남아 있다.

 

유럽인들의 대량 이민 이전의 아르헨티나의 흑인과 아메리카 원주민 인구에 대해서는, 그들이 더 애매해진 민족, 인종적 범주를 “통과”하거나 머무를 수 있던 많은 사람들이 전략적으로 백인으로 정체화되었다. 

 

이러한 분류는 크리요오(주로 스페인인 혹은 아메리카 원주민 조상과 연관된 이전의 이민자들), 모로초(탄 색의 사람들), 파르도(갈색 피부)와 트리게뇨(위트(밀)색)를 포함했다. 이러한 꼬리표들은 그들을 궁극적으로는 “기타”로 묘사했지만, 그들은 또한 국가가 이를 명령한 시기 그들을 흑인으로부터 분리하는 데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국가에서 흑인성을 지우려는 역사와 그 잔재에도 불구하고, 아르헨티나의 흑인 인구는 남아있으며 더 많은 아프리카계 혈통이 이주해 오고 있다.

 

오늘날, 만이천 명에서 만오천 명의 카보베르데에서 온 이민자들과 이들의 후손들이 부에노스 아이레스 지역에서 살고 있다. 90년대와 2000년대에는 유럽이 이민 장벽을 높이면서 서부 아프리카인들이 아르헨티나로 대거 이민해 오기 시작했다. 인구 통계는 아르헨티나가 2001년에는 1,900명의 아프리카 출생 국적자들을 수용했지만, 2010년에는 거의 두 배를 수용했다. 지난 10년 간, 브라질, 쿠바, 우루과이와 같은 다른 라틴 아메리카에서 온 아프리카계의 후손들 또한 경제적 기회를 찾아 아르헨티나로 들어오는 경우가 증가하였다. 

 

이러한 역사는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이 아마도 아프리카인 후손들 혹은 흑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포함하지 않지만, 또한 “백인 팀” 역시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아르헨티나는 근대적인 백인 국가로 보이려는 시도를 통해 인종적 분류를 붕괴시켰지만, 모로초로 일컬어지는 사람들의 존재는 흑인과 토착민 말살의 역사에 빚을 지고 있다. 모로초(morocho)라는 악의 없는 꼬리표는 오늘날 아르헨티나에서 쓰이고 있다. “탄 피부”의 사람들을 일컫는 이 단어는 백인이 아닌 사람들을 구분하는 방법으로 사용되어 오고 있다.

 

아마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유명한 모로초는 80~90년대 두각을 나타낸 축구의 전설 디에고 마라도나일 것이다. 그가 2020년 11월 세상을 떠났을 때, 아르헨티나는 3일 간의 애도 기간을 가졌다. 이 백인이 아닌 전설은 아이러니하게도 “백인 국가”와 아르헨티나 축구의 상징이 되었다. 

 

오늘날 팀의 다양한 선수들은 아르헨티나에서 모로초로 묘사될 수 있다. 이러한 역사를 이해한다면 흔히 많은 사람들이 관련시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다양한 아르헨티나를 볼 수 있다. 또한 많은 국가 지도자들이 근대 국가로써 여긴 방향인, 흑인성을 말살하고 최소화하려던 혼신의 노력을 지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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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8k 금으로 만들어졌다.

 

FIFA 월드컵 트로피는 높이 36cm, 총 무게 6.175kg이며, 18캐럿 금 5kg으로 제작됐다. 초록색 부분은 공작석으로 만들어졌다.

 

2. 트로피는 두 사람이 지구를 들어 올린 모습을 나타낸다.

 

월드컵 트로피는 두 명의 축구 선수가 승리의 순간을 만끽하며, 지구를 들어 올리고 있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월드컵이 전 세계인이 즐기는 최대의 스포츠 축제임을 트로피를 통해 느낄 수 있다.

 

3. 트로피 하단에 우승국 이름이 적혀있다.

 

매 대회마다 우승국 이름과 해당 연도의 숫자가 트로피 하단에 있는 17개 명판에 그 나라의 언어로 새겨진다. 이를테면 ‘2006 Italia’, ‘2014 Deutschland’ 식이다. 1974년부터 현재까지 총 11개의 우승국 이름이 새겨져 있으며, 2018 FIFA 러시아 월드컵을 기점으로 12번째 우승국이 새겨질 예정이다. 2038년에 명판이 모두 차게 되는데, 그 이후 새로운 트로피가 탄생할 가능성도 있다.

 


(▲ 줄리메컵(Jules Rimet Trophy) ©FIFA Museum)

 

4. 지금의 트로피가 최초의 트로피는 아니다.

 

첫 번째 월드컵 트로피는 프랑스 조각가 아벨 라플뢰르(Abel LaFleur)가 디자인한 것으로, 승리의 여신이 8각형의 성찬배를 손으로 받치고 있는 모양으로 만들어졌다. 월드컵 대회의 창시자이자 당시 FIFA 회장이었던 줄리메(Jules Rimet)의 업적을 기려 ‘줄리메컵(Jules Rimet Trophy)’이라 불린다. (지금의 트로피의 공식명칭은 FIFA 월드컵이다.)

 

5. 3번 우승하면 트로피를 영원히 소유할 수 있었다.

 

줄리메컵은 한 국가가 월드컵에서 3번 우승하면 영원히 소유할 수 있다는 규정이 있었다. 1970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브라질이 사상 처음으로 3번 우승하면서 줄리메컵을 영원히 소유하게 됐다. (지금의 FIFA 월드컵 트로피는 소유할 수 없다.)

 

6. 현재 트로피는 1974년 처음 공개됐다.

 

브라질이 줄리메컵을 소유하게 되면서, 이를 대체할 새로운 트로피가 필요해졌다. 멕시코 월드컵이 끝나고 FIFA는 1974년에 열릴 제10회 FIFA 월드컵 대회를 위해 새로운 트로피 디자인을 공모했다. 총 53개의 작품이 접수됐고, 그 가운데 지금의 트로피 디자인이 선정됐다. 제10회 월드컵은 서독(지금의 독일)에서 열렸으며, 우승도 서독이 차지했다.

 


(▲ 실비오 가자니가(Silvio Gazzaniga) © FIFA.com)

 

7. 이탈리아 작가가 트로피를 디자인했다.

 

FIFA 월드컵 트로피는 이탈리아 작가인 고(故) 실비오 가자니가(Silvio Gazzaniga)의 작품이다. 그는 UEFA(유럽 축구 연맹)컵, UEFA 슈퍼 컵, 21세 이하 및 23세 이하 UEFA컵 등 다양한 트로피들을 디자인했다. 그중에서도 역시나 월드컵 트로피가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8. 트로피를 거머쥐었던 나라는 총 8개국이다.

 

1930년부터 지금까지 총 22번의 월드컵이 열렸지만, 트로피를 거머쥐었던 나라는 독일(1954년, 1974년,1990년, 2014년 총 4회), 아르헨티나(1978년, 1986년, 2022년 총 3회), 이탈리아(1934년, 1938년, 1982년, 2006년 총 4회), 브라질(1958년, 1962년, 1970년, 1994년, 2002년 총 5회), 프랑스(1998년, 2018년 총 2회), 스페인(2010년 총 1회), 우루과이(1930년, 1950년 총 2회), 잉글랜드(1966년 총 1회) 등 8개국으로 압축된다.

 


(▲ 피클스(Pickles)가 트로피를 발견한 곳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Getty Images)

 

9. 첫 번째 트로피는 두 차례 도난 끝에 행방불명 됐다.

 

안타깝게도 줄리메컵은 두 차례 도난 끝에 행방불명 됐다. 첫 번째는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을 앞두고, 런던에서 전시회를 하던 중에 도난당했다. 우승컵 없이 월드컵을 치러야 하는 상황이 되면서, 전 세계가 발칵 뒤집혔다. 다행히 7일 뒤 트로피가 모습을 드러내는데, 런던 남쪽 지방에서 주인과 함께 산책을 나온 ‘피클스(Pickles)’라는 강아지에 의해 정원에서 발견됐다.하지만 비극은 다시 일어났다. 1970년 브라질이 월드컵 트로피를 영구적으로 소유하게 되면서 브라질 축구 협회 본부에 전시하게 되는데, 1983년에 도난당한 뒤로 영원히 찾을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현재 브라질은 복제품을 만들어 보관하고 있다.

 

10. 처음 트로피를 찾았던 강아지는 영화에 출연했다.

 

1966년 트로피를 찾아냈던 강아지 ‘피클스(Pickles)’는 같은 해 3월 29일 ‘The Spy with a Cold Nose’라는 코미디 영화에 출연했고, 4년 뒤 1970 멕시코 월드컵에도 초대됐다.

 


(▲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 승리한 독일 선수들이 트로피를 들어 올리며 환호하고 있다. (사진 출처: Facebook @trophytour))

 

11. 각 나라의 국가 원수 혹은 월드컵 우승 선수만 트로피를 만질 수 있다.

 

줄리메컵이 도난당한 뒤, FIFA는 ‘각 나라의 국가 원수나 월드컵 우승을 경험한 선수가 아니면 그 누구도 트로피에 손댈 수 없다’는 규정을 만들었다. 축구 선수들에게 월드컵 트로피를 만지는 것이 영광으로 여겨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12. 트로피는 약 3억 원의 보험에 가입되어 있다.

 

줄리메컵과 같은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FIFA는 월드컵 우승 트로피를 25만 스위스 프랑(한화 약 2억 7000만 원) 상당의 보험에 가입해두었다.

 

13. 월드컵 우승팀은 트로피 복제품을 받는다.

 

첫 번째 트로피였던 줄리메컵은 3번 우승한 국가가 소유할 수 있었지만 현재는 트로피 소유권이 완전히 FIFA에 있다. 즉, 우승해도 트로피를 가질 수 없다는 이야기다. FIFA 월드컵 우승국은 진품 트로피를 잠시 보관하다가, 도금된 복제품을 받는다.

 

14. 진품 트로피는 FIFA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FIFA 월드컵 트로피는 스위스 취리히에 위치한 FIFA 본사에 있다가, 2016년부터 FIFA 세계 축구 박물관(FIFA World Football Museum)에 보관되고 있다.

 


(▲ 사진 출처: 인스타그램 @trophytour)

 


(▲ 사진 출처: 인스타그램 @trophytour)

 


(▲ 2014년 한국에서 열린 FIFA 월드컵 트로피 투어 모습)

 

15. 일반인들이 트로피를 가까이서 볼 수 있도록 ‘트로피 투어’를 개최한다.

 

일반인들이 FIFA 월드컵 트로피를 눈앞에서 볼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을 것이다. FIFA 월드컵의 오랜 파트너사*인 코카-콜라는 2006년 독일 월드컵부터 ‘FIFA 월드컵 트로피 투어(FIFA World Cup™ Trophy Tour)’를 진행해오고 있다. 트로피 투어는 전 세계 축구팬들이 월드컵 진품 트로피를 직접 눈앞에서 보며 월드컵의 성공을 기원하고 감동을 나누는 행사로, 축구와 관련된 다양한 이벤트와 프로그램도 함께 즐길 수 있다. 올해로 4회째를 맞았다.

 

 

 

 

16. 트로피 투어를 위해 코카-콜라 비행기가 제작됐다.

 

FIFA 월드컵 트로피는 코카-콜라 비행기를 통해 전 세계로 운반된다. 

 

 

 

 

출처 : 코카콜라 코리아 홈페이지(https://www.coca-cola.co.kr/stories/sports/world-cup/interesting-facts-of-fifa-world-cup-tro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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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World Cup 2022 win does for Lionel Messi's legend (espn.com.sg)



킬리안 음바페는 승부차기에서 프랑스의 첫 키커를 맡아 골망을 흔들었다. 앞선 해트트릭에 이어서 4번째로 에밀리아노 마르티네스가 지키는 골문을 뚫어낸 순간이었다. 그에 이어서, 리오넬 메시가 아르헨티나의 포문을 열기위해 등판했다.

 

 

옛말에 따르면, 승부차기에서 최고의 키커는 마지막 순간이나 탈락의 위기에서 기용해야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번 결승전이나, 나아가서 이번 월드컵에서 그런 전통이나 지혜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메시는 골반에 손을 얹고 잠시 멈춰섰다가 이내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곧 그는 공과 프랑스의 골키퍼 위고 요리스를 정 반대 방향으로 날려버렸다. 이제 1 대 1이 되었고, 승부는 메시의 손을 떠나갔다. 그리고 아마도, 그곳엔 아주 큰 해방감이 있었을 것이다. 아르헨티나의 우승을 위해서 메시는 더 이상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이제는 열띤 응원과 주장으로의 역할만이 남았고, 메시는 포옹과 하이파이브로 아르헨티나의 다음 키커들을 마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곤살로 몬티엘이 패널티 킥을 성공하고 4 대 2 상황을 만들면서 아르헨티나는 챔피언이 되었다. 하지만 메시가 "이제 내 역할은 끝났다."라는 깨달음을 얻었던 순간은 그보다는 더 일렀을 것이다. 어떤 면에 있어선, 우리가 앞으로 길이길이 자손들에게까지 이야기 해줄 카타르의 일요일 밤은 메시에겐 월드컵 우승 실패라는 꼬리표가 마지막으로 따라다녔던 날이었다.

 

 

팀 스포츠에서 개인의 커리어라는 건 무척이나 독선적인 기준이다. 그리고 특히나 축구란 스포츠에선 더욱 이상한 일이다. 선수들은 최대 4~5번의 기회만이 있을 뿐이고, 만약 운이 좋다면 아주 어린 나이에 첫 기회가 올 수도 있지만 또 마지막 기회의 순간엔 이미 너무 늙어 있을지도 모른다. 대회가 진행되는 순간에 컨디션이 좋다는 보장도 없고, 클럽 축구처럼 국적을 선택할 수 없기에 주변 동료들의 수준에 기대야만 한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에겐 월드컵 우승이 없다. 요한 크루이프도, 그리고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도. 

 

 

이번 우승이 메시의 GOAT 여부를 결정짓는 요소는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지난 시간동안 메시를 가려왔던 부당한 구름이 걷히는 순간이라는 점이다. 

 

 

메시의 아르헨티나 국가대표 데뷔전은 단 2분만에 끝났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하나의 징조같았다. 2005년 여름, 바르셀로나의 영재였던 18살의 메시는 63분만에 교체로 데뷔전을 치루게 되지만, 이내 팔꿈치로 상대 선수를 가격하고 2분만에 퇴장당하게 된다. 

 

 

메시의 커리어가 활짝 꽃 피우고, 클럽엔 우승 트로피를, 본인은 발롱도르를 쌓아나갔던 순간에도, 또 아르헨티나의 최다 골 기록을 다시쓰고 (2016년) 최다 출장 기록을 경신 했을 때도 (2021년 여름) 언제나 그에겐 의심의 시선이 함께했었다. 아르헨티나엔 언제쯤 우승 트로피를 가져다줄 수 있을까? 

 

 

실제로 아르헨티나의 어떤 사람들은 메시에게 간절함이 부족하다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결국 메시는 13살에 아르헨티나를 떠나 바르셀로나에 정착한 사람이니까. 그리고 2016년, 코파 아메리카 결승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메시는 축구협회와 이견이 있었음을 밝히면서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한다. 전국적으로 메시의 복귀를 바라는 캠페인이 있었고, 이는 메시의 애국심에 대해 의심하는 불합리함의 민낯을 밝혀냈다. 그리고 결국 2018년 러시아 월드컵 진출권을 따내기 위해, 메시는 돌아오게된다.

 

 

그럼에도, 메시에게 있어서 국가대표 커리어는 큰 오점이었다. 4번의 코파 아메리카와 3번의 월드컵에서 준우승만 3번. 후회와 '이랬으면 좋았을텐데'하는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메시의 팬들은 2019년 코파 아메리카가 터닝포인트였다고 지목한다. 아르헨티나는 개최국 브라질에게 4강에서 무릎꿇게 된다. 그리고 경기가 끝난 이후, 메시는 메시 답지 않았다. 그는 심판을 비난했고, 이전에는 거의 볼 수 없었던 날카로운 모습들을 연출했다. 메시는 이미 몇년 전에 아르헨티나의 주장을 맡기 시작했지만, 이런 화나고, 비꼬는 모습의 왈패 메시는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네덜란드전 이후에도 이 메시가 나왔는데, 베호르스트에게 "뭘 꼬라봐 바보야"라는 말을 했다."

 

 

2021년 여름, 메시는 드디어 그동안 등에 지고있던 국대 무관의 저주를 떨쳐내고 조국을 코파 아메리카 우승으로 이끌게 된다.

 

 

어떤 부분에 있어선, 지난 여름에 있었던 모든 일들은 이번 월드컵 우승의 전주곡처럼 느껴진다. 아르헨티나의 감독 리오넬 스칼로니는 2010년의 마라도나나 2018년의 삼파올리와 다르게 선수들에게서 언론플레이와 멘탈 흔들림을 막아내는데 성공했고, 아르헨티나는 긴 무패행진을 이어가면서 메시 의존도를 줄이는 시스템을 장착하는데 성공한다. 메시는 팀의 승리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맡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팀의 전체는 아니었다. 또 PSG에서 네이마르나 음바페와 같은 스타 선수들과 뛰는 부분이 메시가 받는 스포트라이트를 일정부분 줄여주기도 했다.

 

 




이제는 모든 것이 메시의 월드컵 우승이라는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기란 어렵지 않을테지만, 그것이 지금까지 메시가 아르헨티나를 어떻게 이끌어 왔는지 잊어버리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

 

 

사우디아라비아에게 첫 경기를 패배한 아르헨티나에게 있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경기였던 멕시코 전에서 메시는 0 대 0의 균형을 깼다. 그리고 결승까지 토너먼트를 진출하는 과정에서 모든 경기 득점을 올렸다. 결승전 프랑스를 상대로는 1 대 0을 만드는 첫 패널티를 성공시켰고, 역습의 기점 역할을 하면서 2 대 0을 만드는데 공헌했으며, 연장전에선 몬티엘이 핸드볼 반칙을 저지르지만 않았다면 결승골이 되었을 재역전골을 넣기도 했다.

 

 

해트트릭을 기록한 음바페를 상대로 승리를 거뒀다는 점은 아주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이건 현재를 두고 싸우는 '곧 과거의 유산이 될 사람'과 '다가오는 미래'의 대결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메시의 현재'였다.

 

 

GOAT 논쟁에 있어서 메시에게 월드컵은 사실 필수적인게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메시는 22년의 해외생활을 보내면서도 조국과 동료들에게 우승컵을 선사하고자 노력했다. 메시가 아르헨티나에 빚을 졌기 때문이 아니라, 메시가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어떤 사람들은 메시가 이번 월드컵에서 우승했기에 그를 축구계 GOAT위치에 둘 수도 있다. 모두에겐 각자의 기준이란게 존재하는 법이니 그들을 존중한다. 

 

 

사실 필자에게 있어서, GOAT란 것은 단순히 기록으로 비교할 수 있는게 아니다. 그건 마치 사과와 돼지를 비교하는 것과 같다.

 

 

메시는 챔피언스 리그에서 4번 우승했다. 하지만 펠레는 브라질 정부가 펠레의 해외 이주를 막기위해 출국을 금지시켜서 챔피언스 리그에서 (당시 기준으론 유러피안 컵) 뛸 기회조차 없었다. 그리고 마라도나의 시대에 챔피언스 리그를 뛰기 위해선 단지 리그에서 4위 안으로 마감하는게 아니라 1위를 차지했어야만 했다.

 

 

펠레의 커리어 대부분 동안, 그는 전세계 각곳에서 모인 최고 수준 동료들의 지원을 받지 못 했다. 그리고 이건 한 클럽에 3명의 외국인 선수만 보유할 수 있던 마라도나도 마찬가지였다. 메시는 엄청나게 양극화 된 시대에서 살고 있다. 그가 뛰었던 바르셀로나, 그리고 PSG같은 메가 클럽은 때때로 상대팀보다 10배, 20배, 30배 혹은 40배에 달하는 자금을 가지고 있었다.

 

 

또 당대의 기록들만 세울 수 있기에 성취와 위대함을 혼동하는 경우가 있다. 월드컵에서 우승하는 것은 '성취'지만 그렇다고 그게 '위대함'으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현대의 선수들이 더 좋은 경기장, 발전한 스포츠과학, 우수한 유전자, 개량된 훈련 등으로 더 낫다고 이야기하는 단순한 길을 택할 수는 없다. 1968년의 바비 찰튼 경을 지금 시대로 데려온다면 아마도 해리 케인이 그보다 훨씬 더 좋은 선수일 가능성이 무척이나 높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바비 찰튼이 물로켓이란 의미인가? 내 사전에선 절대 아니다.

 

 

누군가에게 있어, 위대함이란 기준은 무척이나 추상적이다. 펠레와 마라도나는 각각의 방식으로 메시에게는 없는 카리스마와, 존재감 그리고 사회적 영향력이 있었다. 그건 메시가 축구선수로서 그들보다 부족해서가 아니라, 성정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때때로 위대함과 성격은 떼어놓을 수 없다. 만약 무하마드 알리가 그저 "캐시어스 클레이" (무하마드 알리 본명)로 남아서 인터뷰도 지루하고 정석적으로 임하고, 사회적 이슈에 대한 발언도 자제했다면 그가 "가장 위대한 선수"로 남을 수 있었을까? (스스로를 변화시킨 부분에 있어선 알리를 존경하지만, 무슨 뜻인지 이해했으리라 믿는다.) 

 

 

메시는 월드컵 우승을 통해서 여러 기준을 통과하게 되었다. 내 논리에 들어맞지는 않지만. 나? 나는 그저 이 위대한 선수가 보답받았다는 부분에 아주 행복하다. 하지만 메시는 단지 그의 발에 공이 있던 순간만 위대했던게 아니다.

 

 

이번 대회를 복기하자면, 리오넬 스칼로니 감독은 '신뢰', '동료들에게 본인의 운명을 맡긴다', 그리고 '그들을 믿는다'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했다. 그리고 이건 메시가 월드컵 내내 보여줬던 자세며, 특히나 승부차기를 성공시키고 센터써클로 돌아오는 모습에서 가장 강조되었던 부분이기도 하다.  

 

 

메시는 동료들에게 믿음을 주었고, 동료들은 메시가 이때까지 그들에게 해왔던 것처럼 메시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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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와 메시에게는 아직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모두 멕시코와의 경기에서 우리가 득점할 때까지 겪은 긴장과 불안감, 그리고 또한 2-0으로 승리한 후 마지막 휘슬에 대한 안도감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사우디아라비아에 패한 후 우리에게는 많은 압박감이 있었고, 그 안도감은 모든 사람들, 팀 전체와 여기 있는 모든 우리 팬들, 그리고 특히 메시에게 있었습니다.

 

아마 그의 마지막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가 조별리그에서 탈락하는 것을 보는 건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결말이었을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16강에 있지 않습니다. 폴란드를 상대로 다시 승리해야 해낼 수 있습니다.

쉽지 않고, 팀은 여전히 더 향상되야 하지만 다행히 우리는 멕시코를 상대한 후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아르헨티나가 토너먼트에서 더 나아가는 것은 힘들것이라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아르헨티나 팀에 대해 다시 꿈꿀 수 있습니다. - 왜냐면 메시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월드컵이 메시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습니다'

 

저는 메시가 아르헨티나 대표팀 여정을 시작하는 곳에 함께 있었고, 그가 이번 월드컵 트로피를 들어올리면서 대표팀의 여정을 마무리할 수 있기를 매우 바랍니다.

 

우리가 20세 이하 대표팀을 위해 함께 했던 첫 훈련에서 그가 공을 터치하는 것을 봤을 때, 나는 그가 매우 특별한 선수가 될거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물론 그를 만나기 전에 바르셀로나에서의 메시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있지만, 그가 아르헨티나를 위해 뛰러 온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으니까요. 그 때 그는 말을 많이 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아주 따뜻하게 팀에 맞아주었고, 그가 얼마나 훌륭한지 빠르게 깨달았습니다.

 

그는 17살일때 네덜란드에서 열린 2005 U-20 월드컵에 우리와 함께 나갔습니다. 저는 당시 주장이었고 우리는 토너먼트에서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메시와 함께 팀동료로서, 그리고 친구로서 그와 많은 순간을 공유한, 그의 세대의 일부가 됐다는 것이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가 겪은 희생과 그가 겪은 힘든 시간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잊지 마세요. 그가 스페인으로 이주 했을때의 나이는 불과 13살이었다는것을요.

 

저 또한 제 커리어를 위해 어린 나이에 아르헨티나를 떠나야 했습니다. 적응하는데 얼마나 힘들었는지 잘 알고 있지만 제가 세비야에 합류했을 때는 저는 20살이었고 메시는 그저 어린 소년이었어요.

 

이후 그가 인생에서 했던 모든 것이 자랑스럽지만, 그가 아르헨티나를 대표하는 것이 얼마나 의미가 있는지, 그리고 우리와 함께 축구에서 가장 위대한 트로피를 들어올리고 싶어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항상 똑같아요. 메시는 월드컵에서 우승해야만 합니다'

 

지금이야 고국에서의 메시에 대한 애정이 많지만 항상 이렇지는 않았습니다.

 

2014년 월드컵 결승전에서 패한 후 우리는 코파아메리카 2015와 2016 또다른 두 개의 결승전에서도 패배했습니다.

몇몇 사람들과 우리 언론의 일부에게, 단지 결승전에 도달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당시 메시가 바르셀로나에서 했던 것처럼 우리가 모든 것을 쟁취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메시에 대한 비판이 많았습니다.

 

이후 대표팀을 포기하고 재충전의 시간을 가졌지만 그는 대표팀이 자신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빠르게 깨달았습니다.

메시는 다시 돌아와 우리가 이기는 것을 돕기 위해 필사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작년 코파 아메리카에서 그의 첫 메이져 트로피를 차지한 것은 매우 놀라웠습니다.

 

그 우승은 그의 부담감을 조금 덜어주었고, 그가 클럽에서 뛰던 방식으로 우리를 위해 뛰지 않았다고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멈췄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사람들은 월드컵에서 메시에게 많은 것을 기대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대회가 메시에게 정신적으로 힘든 시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것은 그가 릴렉스 할 수 있도록 도와줄 적절한 사람들을 두는 것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무엇이 바뀌었는가? 메시는 성숙해졌다.'

 

2018년 월드컵 당시 저는 러시아에서 BBC 전문가로 있었는데, 멀리서도 메시가 스트레스를 받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매우 걱정이었습니다. 그 팀은 좋은 위치에 있지 않았고 일찍 탈락했습니다.

 

제가 그와 함께 있었던 2014년 브라질에서 결승에 오른 아르헨티나 대표팀하고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는 당시 팀을 이끌고 있었고 팀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이번 대회가 시작되기 전에 메시가 그때 느꼈던 기분과 지금 선수단의 분위기가 비슷한 점이 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건 정말 좋은 징조인데 그것은 같은 연대감이 있다는 걸 의미하고, 또한 그가 행복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메시가 말을 할때는 모두가 듣습니다. 2014년에도 마찬가지였죠. 하지만 메시는 항상 조용했고 많은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우리의 주장이었지만 그의 경험과 성격 때문에 하비에르 마스체라노가 그 역할을 대신 맡았었죠. 마스체라노는 경기 전 라커룸에서 우리를 준비시키는 목소리가 아주 큰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그것을 하는 사람은 메시 자신입니다. 그는 우리의 최고 선수일 뿐만 아니라 최고의 리더입니다.

그리고 그는 골을 넣는 것만이 아니라 그런 방식으로 이 어려운 시작을 헤쳐나갈 수 있도록 동료들을 도울겁니다.

35세인 메시는 더 성숙하고, 더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고, 가정적인 남자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놀라운 축구선수죠.

 

만약 메시가 이번 월드컵에서 우승한다면, 그는 가능한 모든 것을 이뤘기 때문에 바로 은퇴해야 합니다.

그가 쟁취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을테니까요.

 

 

https://www.bbc.com/sport/football/636968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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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theanalyst.com/eu/2022/11/messi-vs-ronaldo-world-cup/>

 

 

 

 

 

 

메시 vs 호날두 : 마지막 월드컵 대결

 

 < 2022.11.15 / GARETH BOYES (저자), MATT SISNEROS (그래픽) >

 

 

 

 

2006년 21살의 호날두와 18살의 메시가 월드컵에 나올 당시, 사람들은 이들이 향후 16년 동안 세계 최고를 놓고 대결을 하리라 예상치 못했다. 

 

두 선수 모두 카타르에서 마지막 최고의 무대를 준비 중이며, 유럽 축구 무대에서도 그들의 종점이 다가오고 있다. 필 네빌은 메시를 MLS 인터 마이애미로 데려오고 싶어하며 - 16년 전에는 예상할 수 없었을 발언과 함께 - 호날두는 맨유와 험난한 관계의 끝이 오는 걸 참고 기다리고 있다.    

 

메시와 호날두는 개인 통산 월드컵에 5번 출전하는 4~6번째 선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멕시코의 과르다도가 5번째가 될 것 예상) 그리고 아래에는 지난 월드컵에서 두 선수가 어떤 여정을 가졌는지 보여주는 그래픽이 있다.

 

 

 

 

 

 

 

2006 독일 월드컵

 
 
 

 

2006년 여름 리오넬 메시는 이제 겨우 35번의 바르셀로나 시니어 경기를 치렀고, 국대에서도 단 7경기에 나왔을 뿐이다. 그럼에도 독일 겔젠키르헨에서 월드컵 데뷔 무대를 가졌다. 조별 두 번째 경기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전이었다.

 

메시는 75분 교체로 출전한지 얼마 안되어 크레스포에게 어시스트를 했으며 (4-0), 이 날 아르헨티나의 6번째 득점을 본인의 데뷔골로 장식했다.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가 기록한 최다격차 승리 기록과 동률이기도 하다. 그는 1966년 월드컵 이래 10대 선수가 월드컵 단일 경기에서 득점과 도움을 동시에 기록한 유일한 선수로 남아있다.

 

호세 페케르만 감독은 8강전에서 메시를 기용하지 않았고 아르헨티나는 독일과  승부차기 끝에 탈락했다. 월드컵에서 훌륭한 시작을 보인 메시였지만 121분의 출전시간은 그에게 아쉬움을 남겼을 것이다.

 

 

 

 

 
 
 
 
 
 

2006년 월드컵을 앞두고 호날두는 더 큰 기대를 받았다. 05/06시즌 맨유에서 9골 6도움을 기록하며 PFA 리그 베스트에 선정되었고 이후 포르투갈 대표팀에 승선했다. 21세 이하 선수 중에 팀 동료 웨인 루니만이 그보다 더 나은 공격포인트를 기록 중이었다. (16골 9도움)

 

32번의 A매치를 치렀던 호날두는 이미 11골을 기록 중이었다. 그중 7골을 2006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넣었다.

 

불행하게도 당시 월드컵에서 호날두에게 가장 기억되는 순간은 잉글랜드전 루니의 퇴장 장면에 연루된 것이었다. 하지만 조별리그 이란전에서 페널티 득점으로 첫 월드컵 데뷔골을 기록하고, 잉글랜드전 승부차기에서 마지막 4강행을 결정짓는 득점을 성공시켰다.

 

4강 프랑스전에서 호날두는 4번의 슛을 시도했지만 골을 기록하지 못했고 팀은 0-1 패배를 당했다. 2006 월드컵에서 호날두는 (PK제외) 득점없이 가장 많은  슛을 시도한 선수였다. (25회)

 

 

 
 
 
 
 
2010 남아공 월드컵
 

 


사상 최초로 아프리카에서 월드컵이 열렸을 당시, 메시와 호날두는 세계 최고가 되어 있었다. 두 선수 모두 첫번째 발롱도르를 수상했으며, 두 라이벌은 축구에서 최고 시점에 도달해 있었다.

 

2010 월드컵에서 메시는 5경기 모두를 풀타임 출전했지만 기대했던 임팩트를 보여주지 못했다. 대회를 통틀어 16강 멕시코전 어시스트가 유일한 공격포인트였다. 또한 이번에는 메시의 차례였다. 그는 대회에서 29번의 가장 많은 슛을 시도했고, 득점하지 못한 선수중 가장 높은 xG (기대득점)을 기록했다. (1.74)

 

8강전은 지난 대회의 데자뷰였고 아르헨티나는 월드컵에서 최다 득점 패배를 기록하며 독일에게 탈락했다. (0-4)

 

 

 

 

 
 

 

 

 

 

상황은 호날두에게도 좋지 않았다. 월드컵을 앞두고 7번의 지역예선 경기에서 득점에 실패했다.

 

조별예선에서 브라질, 북한, 코트디부아르를 상대로 겨우 버틴 포르투갈은 16강에서 스페인에 0-1로 패배했다. 호날두의 대회 유일한 공격포인트는 7-0으로 승리했던 북한전에서 나왔다. (1골 1도움)

 

 

  
 
 
 
 
2014 브라질 월드컵
 
 
호날두는 국대 (POR) 통산 최다 득점자 (49골)로 팀을 월드컵으로 이끌었지만, 포르투갈은 2002년 대회 이후 조별리그에서 탈락하는 실패를 맛봤다. 
 

개막전 독일에게 0-4 굴욕적 패배, 미국과 무승부, 그리고 가나에 승리했다. 부상이 호날두가 최고의 모습을 보이는데 방해가 되었다. 그는 미국전에서 95분 실베스트레 바렐라에게 어시스트를 기록했고, 가나전에선 늦은 시간 결승골을 성공시켰다. 하지만 포르투갈은 미국에게 골득실에서 뒤지며 조별 탈락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메시는 1990년 이후 처음 아르헨티나를 월드컵 결승전으로 이끌었다. 1990년에도 아르헨티나는 결승전에서 독일에게 패배했는데 이번에도 똑같은 운명이 찾아왔다.

 

메시는 조별예선에서 보스니아, 이란, 나이지리아를 상대로 모두 득점에 성공하며 팀을 16강에 진출시켰다. 메시는 토마스 뮬러, 네이마르와 함께 조별리그 최다 득점자에 올랐다.

 

토너먼트에서는 득점하지 못했다. 하지만 16강 스위스전에서 디마리아의 결승골에 어시스트를 기록했다. 월드컵이 끝난 시점에 콜롬비아의 하메스 (6골), 독일의 뮬러 (5골)가 메시 보다 더 많은 득점에 성공한 선수였다.

 

어느정도 논란이 있었지만 메시는 대회 활약으로 '골든볼'을 수상했다. 1986 마라도나 이후 아르헨티나 선수로 처음 대회 MVP에 선정되었다. 메시는 2014 월드컵에서 23번의 기회창출, 17번의 오픈플레이 상황에서 기회창출, 46번의 드리블 성공 (76회 시도), 165번의 볼 운반 (Ball carries), 그리고 페널티 박스 안으로 61번의 패스를 성공시켰다.    

 
 
 
 
 
 
 
2018 러시아 월드컵
 

 


러시아에서 열린 월드컵을 페널티 실축으로 시작한 메시, 그리고 아르헨티나는 첫 경기 아이슬란드전에서 1-1 무승부를 기록했다. 조별 두번째 경기 크로아티아전에서 그는 단 한 번의 슛도 시도하지 못하며 팀은 0-3 대패를 당했다. 월드컵 경기 중 유일하게 슛을 시도하지 못했던 경기였다. 메시의 4번째 월드컵은 힘들게 시작되었다.

 

조별 마지막 경기에서 메시는 반등했다. 나이지리아전에서 선제골을 넣었고 경기 승리를 바탕으로 16강에 조 2위로 진출했다. 상대는 대회 우승팀이 되었던 프랑스였다. 16강에서 2도움을 기록했지만 결국 팀은 탈락했다. (2-4 패배)

 

 

 

 

 
 
 
 
 
 
 
호날두에게도 16강 탈락이라는 같은 운명이 기다렸다. 하지만 메시와 반대로 월드컵 시작은 좋았다. 조별 첫 경기에서 호날두는 스페인을 상대로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팀의 패배를 막아냈다. (3-3) 월드컵 역사상 최고령 선수의 해트트릭 기록이기도 하다. (33년 130일)

 

두번째 모로코전에서도 결승 득점에 성공하며 팀의 승리를 이끌었다. (1-0) 이 골로 호날두의 통산 득점은 7골이 되었고, 에우제비우 다음으로 포르투갈 선수 중 월드컵에서 많은 득점을 기록하게 되었다. (에우제비우 통산 9골 - 1966)

 

 

 

 

 

 

 

토너먼트 부진 문제

 

 

 

지금까지 보면 메시와 호날두 모두 월드컵 토너먼트 단계에서 단 한 골도 득점에 성공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두 선수의 출전시간을 합쳐보면 1,270분인데 48번의 슛시도와 16번의 유효슛이 있었지만 득점은 없었다. 기이한 일이라 할 수 있지만 올해 카타르에서는 분명 깨지리라 본다.
 
 
 
 
 
 
 
 
 
 

 

2006년 처음 두 선수가 월드컵에 출전한 이래, 150명의 선수가 토너먼트 단계에서 득점에 성공했다. 동기간 클로제, 스네이더, 토마스 뮬러는 모두 각각 5골을 득점했다.
 
2006년부터 호날두의 25번 메시의 23번이라는 수치가 월드컵 토너먼트 단계에서 득점에 성공하지 못한 선수의 최다 슛시도 기록이란 건 놀랍지 않다. 메시의 (PK제외) 1.92 xG (기대득점) 또한 월드컵 토너먼트에서 득점하지 못한 최다 누적 xG 기록이다. 호날두에게는 (xG 부문에서) 그나마 4명의 선수가 앞에 있다는게 위안이 될지도 모르겠다.    

 

 
 
 
 
 
 
 
 
 
만약 호날두 (37세)가 카타르에서 토너먼트 무득점 기록을 깬다면, 그는 두번째로 월드컵 토너먼트 고령 득점자가 될 수 있다. (최고령 득점자 : 카메룬 로저밀러 38세); 또한 호날두는 월드컵 역사상 5대회에서 득점한 최초의 선수가 될 수 있다. 
 
 
 
 
 
 
 
마지막 전쟁
 
 
아르헨티나와 포르투갈이 12월 카타르 월드컵 결승전에서 맞붙을 가능성도 충분히 존재한다. 메시와 호날두의 대전이 최고의 무대에서 성사된다면, 세계 축구팬들에게 조금 이른 크리스마스 선물이 될 것이다. 
 

두 선수는 조별리그 순위에 따라 4강전에서 만날 가능성도 남아있다. 또한 3-4위전에서 경기가 성사될 수도 있다. 그렇게 된다면 월드컵 역사상 최고의 3-4위전이 될 것이다.

 

 

 

 

 

 
 
 
 
 
 

 

최근 대회에서 메시는 자신의 팀 (PSG)을 캐리하고 있다. 유럽 5대리그에서 유일하게 10도움을 기록 중이다. 오직 엘링 홀란드 (21골 3도움) 그리고 네이마르 (11골 9도움)가 리그 공격포인트 부분에서 메시 (7골 10도움) 보다 높을 뿐이다.

 

이번시즌 공격부분에서 봤을때, 유럽 5대리그에서 메시는 가장 위협적인 선수이다. 90분당 (PK제외) 1.2 xGA (기대공격포인트)를 기록 중이다; 그는 더 높은 득점 포지션과 찬스메이킹을 가져가고 있다.

 
 
 
 
 
 
 
  
 
 
반면 호날두의 활약은 매우 초라하다. 2022년 포르투갈 대표팀에서 그는 1골을 넣기 위해 284분을 쓰고 있다. 2009년 1골당 510분이 걸리던 이후 최악의 기록이다. 클럽에서의 상황 또한 좋지 못하다. 호날두는 자신의 공격에 방해물로 에릭 텐하흐의 맨유를 뽑았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지난 주 호날두가 클럽과 그 감독을 통렬한 인터뷰를 통해 공개 비판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프리미어리그에서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현재까지 경기 출전시간이 520분에 불과하며 겨우 1골만 기록하고 있다. 그는 과거 자신의 파워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음을 절실하게 증명하고 싶어한다. 이번 시즌 (PK제외) 호날두의 xG (기대득점) 값은 단 0.08에 불과하다. 그의 리그 통산 가장 낮은 기록이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2022/23 프리미어리그에서 162명의 선수가 득점 중이며, 오직 데마라이 그레이 (3.4%) 만이 호날두 (4.0%) 보다 득점 전환율이 낮다. 하지만 호날두는 호날두다. 그를 함부로 배제할 수는 없다.
 

 

월드컵 역사상 5개 대회에서 모두 득점한 최초의 선수가 되기 위해 1골이 필요하다. 그렇게 될 경우 브라질의 펠레, 독일의 우베 젤러, 그리고 클로제의 기록을 넘어서게 된다. 이번시즌 초라한 폼에도 불구하고 가나, 우르과이, 대한민국과의 조별리그에서 호날두가 기록을 만들어 낼 거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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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g debate: Where does Lionel Messi rank among the greatest footballers ever?

 

Pele? Diego Maradona? Cristiano Ronaldo?

 

We have a look at where Messi ranks among the best to ever kick a football


  • The best ever? 

    어메이징한 플레이어고 올타임 베스트 중 한명이지.  
    그렇지만 개인적으로는 나의 베스트는 아니다.  

    나는 이 3명을 피부로 직접 체감했고, 왜냐면 그때 축구는 너무나 다르니까.
    펠레는 그의 시대에서 최고다.
  • 마라도나는 이 중에서도 다른 레벨에 올라있다. 

    내 관점에서는, 펠레와 현대선수들을 비교하는 건 의미가 없다. 
  • -John Cross 

    내 생각에는 디에고 마라도나가 역대 최고다. 
    그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개인의 힘을 보여주면서 월드컵에서 승리했다.  

    마라도나는 아르헨티나가 1986월드컵에서 우승한 이유였다.  
    왜냐면 단지 좋은 팀을 거의 혼자만의 능력으로 가장 위대한 경지로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난 호날두를 그 다음으로 놓겠다.  
    왜냐면 그가 최고일 때는 unstoppable. Just incredible이기 때문에. 
    만약 메시 위에 호날두를 놓는다면 당신들은 그걸 소수로 치부할 테지만, 뭐 다른 것도 좋다. 

    그리고 그 다음이 리오넬 메시다. 
  •  

  • Maradona was incredible to watch  
    Pele has won three World Cups
  •  
  •  
  • -Darren Lewis 

    역대에서, 영예, 퍼포먼스, 그리고 영향력까지 가진 선수들이 있다. 
    메시가 역대 선수들 사이에 들어가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내게 있어, 최고는 펠레가 되어야만 한다.  
  • 우리는 메시와 호날두라는 그들의 시대에서 정점인 훌륭한 선수들을  
    - 그리고 그조차도 아마 충분하게 표현한 건 아니다 - 목격한 건 정말로 운이 좋았다. 
  •  
  • 그러나 당신은 특출나고 예외적인 선수들을 비교할 땐, 
  • 개인적인 기준으로 결론내리게 될 것이다.그 나이에 펠레는 브라질에서 월드컵을 우승했고, 총 3회 우승을 했다. 

    Messi? None. 

    펠레가 오늘날까지 지닌 임팩트를 상상해 보자.  
    그 순수한 피치에서, 펠레의 압도적인 퀄리티로 인해그리고 얼마나 그 밖의 다른 것들을 또 가졌을지를. 

    펠레는 50년 월드컵에서 우루과이에게 박살난 패배 이후아름다운 게임과 동일시되고 있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즉흥적으로도 양발과 머리를 모두 사용해서 슛을 쏠 수 있었다. 

    그는 메시의 능력들 그 이상으로 모든 것들을 다 할 수 있었다. 
    내게 있어 최고는 펠레가 되어야만 한다. 


    나는 1986년의 디에고 마라도나보다 더 뛰어난 개인 퍼포먼스를 전혀 본 적이 없다. 
    그때 그는 자신의 힘만으로 월드컵에서 우승을 실천해냈다. 

    메시는 지금 세대에서 베스트 플레이어지만,  
    내게 있어 그가 마라도나와 같은 레벨로 판단되기 위해서는
    Maradona almost single-handedly won the World Cup for Argentina in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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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메시는 아르헨티나를 월드컵의 영광으로 이끄는 게 필요하다.

  • -Neil McLeman
  • 펠레에 대한 브라질 조국의 믿음을 혁신한 인물이다. 

    그는 그의 슈퍼스타적인 능력으로 전세계를 눈부시게 했다. 
    그는 여전히 그의 조국에서 올타임 1위 스코어러이며,
  • 다른 선수들에 대한 공격자들과 보호의 규정들이 생겼다는 것을. 
    그가 얼마나 많은 발롱도르와 골든슈,
  • 메시는 17살에 경쟁력있는 데뷔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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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vid Maddock 

메시는 명백하게 역대 선수들의 그 라인에 서 있다.  
그러나 예를 들어 메시와 조지 베스트를 어떻게 비교할 것인가.

아니면 펠레나 푸스카스 등과. 

메시는 그의 세대에서 최고 중의 하나고, 그건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비록 아무리 과소평가하려고 해도 그건 인정해야만 한다. 

메시는 바르셀로나에서 커리어 전체를 보냈다. 
그리고 스탯을 올리는 것을 도와주는 이 시대에서

가장 도미넌트한 관점에서 플레이를 하는 공격수로서 말이다.

 

메시는 최고 중의 하나다. 그러나 바르셀로나 외에서도 증명할 필요성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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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essi is one of the best... but does he need to prove himself away from Barcelo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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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teve Bates 


    리오넬 메시는 그의 발에서 마법을 보여준다.  
    그러나 내 책에서는 그는 세계적으로 보여준 면에서는 최고가 아니다.  
    그 영광은 디에고 마라도나로 가야만 한다. 

    우리는 모두 펠레가 더 많은 골을 넣었고, 메시가 더 많은 우승을 했다는 걸 안다. 
    그러나 마라도나를 탑에서 끌어내리기에는 여전히 충분하지 않다. 

    마라도나는 본능적인 강력함과 천재적인 폭발력을 지녔다.  
    심지어 그는 코카인, 총격, 여자, 상해 등을 포함한 두드러지는 논란거리들 후에
  • 궁극적으로는 자기 파괴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 메시는 기술과 득점력 관점에서는 뒤에 있지 않지만,  
    최종적인 분석에서는 - 최소한 지금까지는 - 그는 역대 최고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왜냐면 그의 커리어가 아직 축구적으로 역대 최고가 되기에는  
    마라도나를 배제할 만큼의 규정짓는 그런 류의 사건이 없기 때문이다. 

    1986월드컵에서 마라도나는 5골 5어시스트 및 절대적이고 경이적인 퍼포먼스와 함께
  • 폭풍을 일으키며 토너먼트를 지배하면서 
  • 결국 아르헨티나에 월드컵 우승을 가져왔다.


    아마 우리는 이번 여름 월드컵에서 메시로부터 같은 걸 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바르셀로나 스타로부터 
  • 그런 종류의 영향력을 월드 스테이지에서 볼 때까지는 진짜 논쟁은 없을 것이다.메시 스스로 마라도나에 대해 말한 걸 들어보라.
    메시는 이미 이렇게 말했었다.  

    "비록 수백만년을 플레이해도, 나는 마라도나에 근접할 수 없을 것이다"  "He's the greatest there's ever b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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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리고 만일 당신이 나를 믿지 못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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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mirror.co.uk/sport/football/news/big-debate-lionel-messi-rank-12050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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