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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 : 락싸커 '서초패왕 항우'

 

대부분 이순신이 압도적인 화력을 앞세웠기에 승리는 당연할 수밖에 없었다 말하는데...

현실은 절대로 그렇지 않다. 전투 당시엔 화력 뿐만이 아닌 다른 요소들도 고려하여야 했다.

 

 

초기엔 화기의 조준선 정렬도 지금처럼 정밀한 수준이 아니기 때문에 총통의 사거리가 확보되어도 목표물에 제대로 명중하기란 숙련시키기가 꽤 어려운 일이었으며, 거기서 해상 포격전은 움직이는 배가 움직이는 배를 쏴야하기 때문에 적중률은 당연히 더더욱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마찬가지로 화약과 탄도의 낭비 또한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적은 숙련도 임에도 불구, 화약도 아끼고 화기의 위력을 극대화 시키기 위해서는 자연히 유효타를 발휘할 수 있는 가까운 적정거리 확보가 우선시되었는데 이에 『수조규식(水操規式)』 을 따르면 중·대형 화기의 적정 사거리는 200-250보(步)라 전해진다. 솔직히 이 정도 거리라면 압도적인 장거리 화력의 위력에 힘 입었다고 보기에는 민망한 수준;;...

 

이뿐만이 아니다. 해전은 앞서 말했듯 움직이는 배끼리의 싸움이기에 다가오는 목표의 거리변화도 쉴틈없이 계산하는 건 당연하고, 화기의 발포 이후 재장전 시간도 고려해야만 한다. 또한 해류에 따른 변동요인들도 고려해야 한다. 즉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이 조금이라도 엇나갔다간 적으로부터의 근접전을 허용하게 되는 것... 마찬가지로 이러한 상황에서 『수조규식(水操規式)』 은 기본적으로 '100보 이내로 적이 접근하면 소형 화기로, 90보 이내로 적이 접근하면 장전시간의 제약이 없는 활로 지원사격을 하라.' 전하고 있다. 덧붙이자면 사실 천자총통, 현자총통 같은 중·대형 화기의 재장전 시간은 조총보다 길었음 길었지 절대로 짧지 않다...

 

또한 당시의 탄도도 폭발하는 형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오히려 조선수군이 적선의 분멸을 위해 접근을 감행하는 일이 많았다. 그 후 총통의 탄도로 적의 선체에 물리적 충격을 가하여 구멍을 만들고, 그 선체의 구멍으로 제 기능을 못하게 된 적선에 화공을 가하는 게 바로 적선을 분멸시키는 방법인데... 그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진형을 형성하여 포위망을 좁혀가는 것이 당연지사다.

 

 

 

 

즉 원거리에서 포만 뻥뻥 쏴댄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 조선 수군의 전투 지휘는

 

 

 

 

화기의 재장전 타이밍 계산 + 전투 당시의 해류 변화

+ 적의 이동속도 + 화약과 탄도 소비 계산 + 진형 형성과 유지 요령

+ 적정 사거리 계산 + 선체 분멸을 위한 화공 시기 계산 등...

 

 

 

이 모든 요소들을 다 고려해야 하는 것...

 

 

 

 

 

 

그렇다고 칠천량 해전에서 이 인간이 말아먹은 걸 정당화 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수십 차례의 해전을 치루면서 축적된 노하우를 이용도 한번 못한 채 날려먹고 도주한 건

엄청난 무능이고 직무유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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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의 군졸들이 태반이나 전염되어 사망자가 속출하고 있으며, 더구나 군량이 부족하여 계속 굶게 되고 굶던 끝에 병이 나면 반드시 죽게 되는지라, 군사의 정원은 매일 계속해서 줄어지니 다시 보충할 사람이 없을 뿐 아니라, 신이 거느린 수군만을 헤아려 보아도 사부와 격군을 아울러 원래의 수 6,200여 명 중에서 작년과 금년에 전사한 사람의 수와 2ㆍ3월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병사자가 600여 명이나 되는데, 무릇 이들 사망자는 모두 건강하고 활을 자 쏘며 배도 잘 부리는 토병과 보자기들이오며, 겨우 남아있는 군졸들은 조석으로 먹는 것이 불과 2ㆍ3홉이라, 궁색하고 고달픔이 극도에 달하여 활을 당기고 노를 젓기에 도저히 감당할 수 없사옵니다."

 

-만력 21년(1593) 8월 10일자 장계 중-

 

 

 

"삼가 상고할 일을 아뢰옵니다.

작년 2월부터 전라 좌ㆍ우도와 경상우도의 사부(射夫)와 격군(格軍)들을 한 곳에 모아 한 해가 다 지나도록 파수했어도 병으로 죽은 자는 많지 않았는데, 금년 1월에는 처음으로 진중에 유행병이 크게 번져 누워서 앓는자가 서로 이었으므로 약물을 많이 준비하여 백방으로 치료하였으나 효력을 보는 자는 매우 적고 사망자가 매우 많은 데, 그 중에 오랫동안 병들어 있는 사람은 배로 실어다가 내어 보냈습니다.

그런데, 1월부터 2ㆍ3ㆍ4월까지 3도의 사망자 수는 전라좌도가 606(406-전서)명이고, 현재 앓고 있는 자가 1373명, 우도의 사망자는 603명에 앓고 있는 자가 1878명, 경상우도는 사망자가 344명에 앓고 있는 사람이 222명, 충청도는 사망자가 351명에 앓고 있는 자가 286명으로 모두 3도의 사망자 수는 1904명(1704-전서)이며 앓고 있는 사람이 3759명입니다.

무고한 군사와 백성들이 이렇게 사망하여 수군의 사부와 격군이 날마다 점점 감축하니 허다한 여러 전선을 재빨리 운용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근일에는 왜병들이 새로 많이 들어와서 호남으로 침범할 위험이 눈 앞에 보이고 있는 때에 참으로 민망스럽고 걱정이 되옵니다."

 

-만력 22년(1594) 4월 20일자 장계 중-

 

 

 

"3도의 수군들이 한 진중에 모여 있으므로 봄부터 여름동안 전염병이 크게 번졌습니다.

약물을 많이 준비하여 백방을 치료에 전념하였어도 효력을 본 사람은 매우 적고 사망한 사람은 매우 많사옵니다.
무고한 군사와 백성들이 나날이 점점 줄어들어서 허다한 전선을 운용하기 어렵게 된 바,

급한 때를 당하여 참으로 민망스럽고 걱정이 되옵니다.

조정에서는 충분히 참작하여 유능한 의원을 특명으로 내려보내 구호하도록 하여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일자 파악 불가-

[의원을 보내어 전염병 환자를 구호해 주기를 청하는 장계]

 

 

 

 

 

 

출처 : 『임진장초』

 

 

 

이순신 휘하 조선수군 1위의 사망원인은 전투로 인한 사망도, 엄격한 군율에 의한 수형도 아닌

 

'역병'

 

 

전염병으로만 2,500여 명이 사망... 감염자는 최소 7,000명 수준으로 예상

이때 당시 조선 수군의 주요 지휘관으로는 최고의 수로 전문가인 '어영담' 사망...

 

 

참고로...

 

 

<1593년부터 1594년 당시 조선 수군의 총 병력>

15,000~20,000여 명

 

<임진왜란 발발초부터 이 당시까지의 전투로 인한 조선군 사상자 수>

'많게' 봐야 300여 명(사망자 최대 40여 명)

※ 경미한 부상자까지 포함

 

<임진왜란-정유재란의 7년 동안 이순신 장군 휘하의 전투로 인한 사상자 수>

수십 차례의 해전 전적을 통틀어 합쳐도 800여 명(사망자 최대 290여 명)

※ 이것 역시 경미한 부상자까지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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