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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washingtonpost.com/made-by-history/2022/12/08/why-doesnt-argentina-have-more-black-players-world-cup/

 

Perspective | Why doesn’t Argentina have more Black players in the World Cup?

Argentina is far more diverse than many people realize — but the myth that it is a White nation has persisted.

www.washingtonpost.com

 

이번 2022 월드컵에서의 아르헨티나의 성공을 바라보며, 한 가지 질문이 여러 팬들 사이에서 흔히 나타났다. 왜 아르헨티나 국가대표팀은 많은 흑인 선수들을 보유하고 있지 않은가? 아르헨티나의 축구 국가대표팀은 브라질 같은 다른 남아메리카 국가들과는 극명히 대조적으로, 흑인 대표 선수들의 비율이 현저히 떨어진다.

 

 

이런 분석은 새로운 것은 아니다. 2014년, 분석가들은 월드컵 결승전에서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에 적어도 한 명 이상의 흑인 선수가 있던 반면 아르헨티나는 한 명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는 농담을 던졌다. 2010년 아르헨티나 정부의 인구 조사 통계에서는 흑인의 수가 국가의 1%에도 훨 못 미치는 149,493명으로 나타났다. 아르헨티나가 정말로 백인 국가임을 확인시켜준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거의 20만 명의 아프리카 노예들이 아르헨티나가 식민지였던 기간 동안 라 플라타 강 기슭에 상륙했었고, 18세기 말엽에는 인구의 3분의 1 가량이 흑인이었다. 이는 아르헨티나를 백인 국가로 생각하는 것은 부정확할 뿐 아니라, 아르헨티나의 자기 정체화 의 중심에 있는 “흑인 말살”의 긴 역사가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아르헨티나인들에게는 흑인 아르헨티나인들의 부재를 “설명”해주는 것으로 알려진 신화가 있다. 이 중 아마도 첫 번째이자 가장 유명한 신화는 흑인들이 19세기 내내 있었던 전쟁에서 “총알받이”로 사용되어 어마어마한 사망자를 내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아르헨티나 독립 전쟁(1810~1819) 동안, 노예들은 스페인 군대에 맞서기 위해 5년의 복무 이후 자유를 주겠다는 약속과 함께 징병되었다.

 

 

그러나 역사학자 조지 리드 앤드류스가 주장한 대로, 많은 이들이 전장에서 죽기보다는 그냥 버려지거나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을 선택했다. 1829년의 점호에서는 아프리카계 아르헨티나인 제4척후병부대에서 31명의 전사자와 802명의 탈영자가 발생햇음을 보여준다. 이들 중 일부는 훨씬 북쪽의 페루 리마로 재배치되었다. 일부가 죽거나 탈영한 동안, 다른 이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아르헨티나의 가장 유명한 도시인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인구조사 통계에서는, 1778년에서 1836년까지 아프리카 혈통의 인구는 두 배 이상 증가한 것이 드러났다.

 

 

다른 신화로는 19세기 전쟁이 야기한 흑인 남성의 높은 사망률로 인해 아르헨티나의 흑인 여성들이 유럽계 남성들과 가정을 꾸릴 수 밖에 없었고, 이로 인해 흑인의 “실종”이 일어났다는 것이 있다. 몇 세대 이상 걸친 인종 간 혼합이 신체적으로 더 밝고 하얀 피부의 인구들을 만들면서 피해를 준 것으로 생각된다. 이 이야기에서 흑인 여성들은 그들의 삶의 모든 면에 명령받은 강압적인 체제의 일부 피해자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더 최근의 연구들은 일부 아르헨티나의 흑인 여성들이 그들 스스로나 자식들을 위해 백인들에게 제공되는 혜택들을 얻기 위해 백인이나 아메리카 원주민으로 통하는 결정을 결연히 내렸다는 것을 밝혔다. 베르나벨라 안토니아 비야몬테와 같은 몇몇 흑인 여성들은 다양한 법적 정책의 이점을 이용하여 노예로 태어났으나 자유롭게, 그리고 백인 여성으로 인지된 채로 사망했다. 

 

아르헨티나 문화 내 흑인 대표성의 부족에 관한 다른 신화는 질병, 그 중 1871년의 황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일부는 많은 흑인 아르헨티나인들이 그들의 빈곤으로 인해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극심한 감염지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불가능했고 질병에 굴복했다고 주장한다. 이 이론 또한 황열병으로 인한 흑인 사망자 수가 다른 인구에 비해 높은 비율로 나타나지 않아 거짓으로 밝혀졌다.

 

아르헨티나의 흑인 “실종”에 대한 이러한 신화들은 아르헨티나의 가장 오래 지속되는 역사적 유산들 중 일부를 모호하게 했다. 

 

실제로 아르헨티나는 노예와 그들의 후손에서 이민자들까지 여러 세기 동안 수많은 흑인들의 고향이었다. 카보베르데인들 19세기의 포르투갈 여권을 갖고 아르헨티나로 이주하기 시작했고, 1930~40년대에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이 선원과 항만 근로자로의 취업을 위해 아르헨티나로 들어왔다. 

 

그러나 아르헨티나의 전 대통령 도밍고 파우스티노 사르미엔토(1868~1874 재임)와 같은 백인 아르헨티나인들의 리더들은 근대성을 백인성(Whiteness)과 동일시하였기 때문에 흑인(Blackness)성을 지우는 다른 서사를 만들었다. 사르미엔토는 아르헨티나의 “후진성”과 사르미엔토가 여긴 “문명화”의 필요성을 서술하는 <파쿤도: 문명과 야만>(1845년 저)이라는 책을 지었다. 그는 국가의 비전을 아프리카나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유산보다는 유럽의 유산과 더 강하게 공유한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아르헨티나는 1853년 국가의 대부분 지역에서, 그리고 1861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노예제를 폐지했다. 노예제의 역사를 뒤로 한 아르헨티나의 리더들은 유럽을 문명과 진보의 요람으로 보면서 근대화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들은 독일, 프랑스, 영국의 반열에 합류하기 위해선 흑인 인구를 신체적, 문화적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믿었다.

 

여러모로, 이것은 아르헨티만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백인화 과정은 브라질, 우루과이, 쿠바와 같은 라틴 아메리카 도처에서 시도되었다.

 

그러나 이 경우 아르헨티나의 유일한 차이점은, 이들은 백인 국가로써의 이미지 구축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1850년대, “통치하는 것은 인구다”라는 말로 알려진 정치 철학자이자 외교관 후나 바티스타 알베르디는 백인 이민을 장려하였다. 아르헨티나 대통령 후스토 호세 데 우르퀴자(1854~1860 재임)는 알베르디의 아이디어를 지지했고 이를 국가의 첫 헌법에 적용했다. 수정 헌법 25조에서는 “연방정부는 유럽 이민을 촉진해야 한다”고 명시되였다.

 

사실 사르미엔토 대통령은 19세기 말엽 “20년 뒤에는 흑인들을 보기 위해 브라질로 여행해야 할 것이다.”라고 발언했다. 그는 흑인 아르헨티나인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으나 국가는 그들을 오랫동안 인정하지 않을 것임을 시사한 것이다. 아르헨티나의 지형은 곧 변화했다. 1860~1914년 사이 4백만의 유럽 이민자들이 정부의 부름에 답하여 이민을 왔고, 이 조항은 오늘날 아르헨티나의 조항에도 남아 있다.

 

유럽인들의 대량 이민 이전의 아르헨티나의 흑인과 아메리카 원주민 인구에 대해서는, 그들이 더 애매해진 민족, 인종적 범주를 “통과”하거나 머무를 수 있던 많은 사람들이 전략적으로 백인으로 정체화되었다. 

 

이러한 분류는 크리요오(주로 스페인인 혹은 아메리카 원주민 조상과 연관된 이전의 이민자들), 모로초(탄 색의 사람들), 파르도(갈색 피부)와 트리게뇨(위트(밀)색)를 포함했다. 이러한 꼬리표들은 그들을 궁극적으로는 “기타”로 묘사했지만, 그들은 또한 국가가 이를 명령한 시기 그들을 흑인으로부터 분리하는 데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국가에서 흑인성을 지우려는 역사와 그 잔재에도 불구하고, 아르헨티나의 흑인 인구는 남아있으며 더 많은 아프리카계 혈통이 이주해 오고 있다.

 

오늘날, 만이천 명에서 만오천 명의 카보베르데에서 온 이민자들과 이들의 후손들이 부에노스 아이레스 지역에서 살고 있다. 90년대와 2000년대에는 유럽이 이민 장벽을 높이면서 서부 아프리카인들이 아르헨티나로 대거 이민해 오기 시작했다. 인구 통계는 아르헨티나가 2001년에는 1,900명의 아프리카 출생 국적자들을 수용했지만, 2010년에는 거의 두 배를 수용했다. 지난 10년 간, 브라질, 쿠바, 우루과이와 같은 다른 라틴 아메리카에서 온 아프리카계의 후손들 또한 경제적 기회를 찾아 아르헨티나로 들어오는 경우가 증가하였다. 

 

이러한 역사는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이 아마도 아프리카인 후손들 혹은 흑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포함하지 않지만, 또한 “백인 팀” 역시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아르헨티나는 근대적인 백인 국가로 보이려는 시도를 통해 인종적 분류를 붕괴시켰지만, 모로초로 일컬어지는 사람들의 존재는 흑인과 토착민 말살의 역사에 빚을 지고 있다. 모로초(morocho)라는 악의 없는 꼬리표는 오늘날 아르헨티나에서 쓰이고 있다. “탄 피부”의 사람들을 일컫는 이 단어는 백인이 아닌 사람들을 구분하는 방법으로 사용되어 오고 있다.

 

아마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유명한 모로초는 80~90년대 두각을 나타낸 축구의 전설 디에고 마라도나일 것이다. 그가 2020년 11월 세상을 떠났을 때, 아르헨티나는 3일 간의 애도 기간을 가졌다. 이 백인이 아닌 전설은 아이러니하게도 “백인 국가”와 아르헨티나 축구의 상징이 되었다. 

 

오늘날 팀의 다양한 선수들은 아르헨티나에서 모로초로 묘사될 수 있다. 이러한 역사를 이해한다면 흔히 많은 사람들이 관련시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다양한 아르헨티나를 볼 수 있다. 또한 많은 국가 지도자들이 근대 국가로써 여긴 방향인, 흑인성을 말살하고 최소화하려던 혼신의 노력을 지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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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tv2.no/sport/fotball/premier-league/wenger-avslorer-odegaard-samtaler-jeg-var-desperat/15386080/?mode=app&app=sporten

 

TV2와의 주요 인터뷰에서 아르센 벵거(73)은 마틴 외데고르(24)와 계약하려는 시도, 그의 큰 관심사, 그리고 오늘날의 아스날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입을 열었습니다.

 

2018년 아르센 벵거가 아스날 감독직에서 사임한 이후 처음으로 이 프랑스인은 에미레이츠 스타디움으로 돌아와서 박싱데이 경기를 지켜봤습니다.

 

스탠드에서 전설적인 감독은 마틴 외데고르가 이끄는 The Gunners가 완전히 지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벵거가 현 아스날 주장에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였습니다.

 

TV2와의 독점인터뷰에서 벵거는 외데고르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전설적인 감독은 다음을 포함하여 노르웨이 스타에 대해 몇가지 주제에 대해 말했습니다.

 

외데고르 영입 실패

그의 외데고르에 대한 관심

벵거를 매료시킨 외데고르의 디테일

외데고르와 오늘날의 아스날에 대한 생각

 

외데고르 영입 사가- 어려웠다

 

시계를 2014년으로 되돌립니다. 축구계 전체가 마틴 외데고르 신드롬으로 침을 흘리고 있습니다. 그 창의적인 선수는 아스날을 포함한 유명 클럽들의 관심을 받고 있었습니다.

 

벵거는 여러 차례 외데고르가 아스날을 선택하도록 설득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저녁식사 자리를 가졌고 벵거는 그의 계획을 설명했었습니다.

 

하지만 15세의 마틴은 레알 마드리드를 선택했습니다.

 

"힘들었습니다. 그가 15살이였을때 저는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박싱데이가 끝나고 실제로 마틴하고 이야기를 나누었죠"


"그와 계약하고 싶었습니다. 다행히 지금 아스날에 있네요. 그는 정말 젊은 세스크 파브레가스 같습니다. 완성도 높은 선수로 성장했다고 생각합니다."

 

외데고르와 다시 만났을 때 어떤 이야기를 나눴나요?

 

"음, 그는 게임 분석을 잘하는 차분한 선수였어요. 자신의 주관이 있습니다. 마틴과 이야기한 내용을 상세하게 말하고 싶진 않습니ㅏ다"

 

외데고르에 대한 인상은?

 

"저는 매우 감명받았습니다. 그는 정말 현실적이고 좋은 소년입니다. 그가 게임을 분석하는 방식. 15살때도 그랬는데. 그 날카로움! 정말 감명 받았습니다. 그는 잘할 것입니다."

 

 



-저는 마틴을 걱정했었습니다.

 

그러나 그 프랑스 인은 외데고르가 가장 큰 무대에서 성공할 지 항상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외데고르는 레알 마드리드에서 많은 신뢰를 받지 못했습니다. 성장이 중단되었다고 벵거는 말합니다.

 

"저는 마틴을 걱정했었습니다. 저는 그가 그의 창의성을 약간 잃었다고 생각합니다. 창의력이 정체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외데고르는 벵거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아스날에 온 후, 그는 자신의 창의성을 되찾았습니다. 그는 놀랍도록 잘 플레이하고 게임의 모든 것을 마스터합니다. 그는 완전합니다. 저는 게임의 모든 면에서 그를 좋아합니다. 수비와 공격에서 모두"

 



벵거를 매료시킨 외데고르의 디테일

 

벵거의 팀은 결국 많은 기술적 기교와 많은 움직임으로 특히 아름다운 축구를 하는 것으로 유명해졌습니다.

 

벵거가 외데고르의 플레이스타일을 좋아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하나를 벵거는 높이 평가합니다.

 

"그는 신속하고 항상 최적의 결정을 내립니다. 놀랍습니다! 저는 그를 좋아하고 그가 축구를 쉽게 하는 방식을 좋아합니다."

 

"그는 매우 잘 발전했습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그는 또한 팀의 리더입니다. 노르웨이는 이제 더 많은 일류 선수를 확보하고 있으며 앞으로 몇 년 동안 그들이 국제무대에서 잘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스날에 대해 벵거- 끝까지 갈 수 있다

 

벵거는 또한 박싱데이에 웨스트햄과의 3대1 승리에서 외데고르와 그의 전 클럽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 프랑스인은 22시즌 동안 아스날을 3번의 프리미어리그 우승으로 이끌었습니다. 이제 그는 리그 타이틀을 다시 한 번 북런던으로 가져올 수 있다고 믿습니다.

 

"환상적인 플레이였습니다. 아스날은 점점 더 강해지고 있습니다. 일방적인 경기였습니다."

 

"전술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필요한 모든 요소를 갖추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끝까지 갈 수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그들은 많은 기회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저는 약점이 보이지 않습니다."



"사임 이후 에미레이츠에서 아스날을 처음 봤는데 어떤 기분이였나요?"

"훌륭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에 대해 많이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외데고르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다시 전화하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를 매우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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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과 축구계의 영원한 레전드 펠레는 2021년 9월에 진단 받은 대장암 합병증으로 투병끝에 오늘 세상을 떠났습니다.

 

3번의 월드컵 우승을 경험한 그는 놀라운 커리어에도 불구하고 축구 인생동안 두곳의 클럽에서밖에 뛰지 않았습니다.-산토스,뉴욕 코스모스

 

많은 이들의 목표가 유럽 축구의 정점에 가서 트로피를 들어올리며 발롱도르를 수상하는것이라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펠레는 왜 대서양 반대편으로 넘어가지 않았을까요?

 

사실 1958년,1962년 월드컵 직후에 펠레를 영입하려는 구단은 꽤 있었습니다.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발렌시아의 이름도 여기에 포함되지만 가장 유명한 사례는 바로 레알 마드리드일것입니다.

 

 

1.펠레의 레알 마드리드 이적설

 

'제가 레알 마드리드와 계약하는것에 있어 근접했던때가 꽤 많았었죠 이후에는 이탈리아의 나폴리와도 계약 기회가 몇번 있었습니다.'

 

'하지만 후회되지는 않아요 저는 산토스에 있었고 당시에 산토스는 강팀이었습니다.'

 

'저는 산토스에서 매우 매우 행복했기에 브라질을 벗어나서 경기를 하지 않았습니다.저는 그곳에서 인생에 있어 15년~20년 동안 머물렀었죠 제게는 레알 마드리드 말고도 다른 제안들이 많이 제의되었지만 제가 있던곳은 괜찮았습니다.'

 




 

2.펠레의 유벤투스,인터 밀란 이적설

 

펠레는 2018년 당시 유벤투스로 이적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에게 축하 인사를 보내면서 과거 유벤투스에 뛸뻔했었다고 말한적 있습니다.

 

'너의 유벤투스에서의 첫경기에 대해서 행운을 빌어,크리스티아누 상황이 달라졌더라면 나도 어쩌면 올드 레이디(유벤투스 별칭)에서 뛰었을지도 몰라'

 

"1961년 어느 저녁에 피아트의 회장(유벤투스 구단주)이 산토스 회장에게 수백만 달러를 건넸었습니다.저를 영입하기 위해서였죠! 하지만 저는 오직 산토스의 이 줄무늬 유니폼을 위해서만 뛰었습니다.!"

 

1958년 당시에는 산토스가 펠레를 인터 밀란으로 이적 시키는것에 대해 합의했었지만 이런 소식이 퍼지자 산토스팬들은 격렬히 반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전 인터 밀란의 회장 마시모 모라티는 당시에 인터 밀란의 회장이자 아버지였던 안젤로 모라티가 펠레의 영입을 철회했던 이유에 대해서 밝혔습니다.

 

'그들과 전화를 했지만 지구 반대편에서는 한 사람의 목숨과 관련된 깊은 염려가 존재했었습니다.'

 

'계약이 순차적으로 진행되었고 체결되었죠 등록만 하면 끝나는 문제였습니다.하지만 이런 소식이 브라질에 당도하자 그곳의 사람들은 그들의 보드진을 공격하기 시작했어요'

 

'이런 상황에서 무엇을 할수 있을까요? 산토스의 회장을 물리적으로 공격하고자 하는 사람을 발견하게 되었을때 그것은 더 이상 축구가 아니라 계약을 파기한 저희 아버지의 양심적인 행동과 관련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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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telegraph.co.uk/football/2022/12/27/arsene-wenger-statue-arsenal-ready-build-tribute-former-manager/

제레미 윌슨 2022/12/27

 

아스날은 박싱데이에 열린 홈 경기에 아르센 벵거가 스타디움으로 돌아 온 후 가능하면 내년 초 에미레이츠 스타디움 외부에 아르센 벵거의 동상을 세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아스날은 벵거가 허버트 채프먼 전 감독, 티에리 앙리, 토니 아담스, 데니스 베르캄프를 이어 구단의 전설적인 영원한 존재가 되기를 원했지만, 벵거는 이번주 전 까지 경기장에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벵거는 2018년 5월 아스날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고 인정했는데, 당시 새 감독이 자리를 잡는 동안 클럽에 남아있지 않는 것이 모든 측면에서 더 좋을 것이라는 의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나이 에메리 시절에는 그 과정이 완료되지 않았지만, 벵거의 전 주장 중 한 명인 미켈 아르테타는 이제 새로운 세대의 젊은 선수들과 함께 프리미어리그 정상으로 도달하였습니다.

 

아르테타와 함께 아스날의 전 부회장인 데이비드 데인은 최근 몇 달 동안 벵거의 에미레이츠 복귀를 독려해왔으며 월요일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와의 경기에서 벵거는 아스날 팬들로부터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습니다.

 

벵거의 전 부인인 애니 브로스터하우스는 특히 임기 말년 동안 벵거가 아스날 감독직을 계속 수행해야 하는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헀던 아스날 팬들의 반응에 감동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구단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들 사이에서 벵거의 지위에는 논쟁의 여지가 없었고, 그가 복귀하기를 원하는 팬들의 압도적인 열망은 최근 아스날 서포터스 트러스트 회의에서 벵거를 아스날로 데려왔던 절친한 친구 데인에게 전달되었습니다.

 

데인은 벵거가 22년간 감독을 맡으면서 프리미어리그 3회 우승, FA컵 7회 우승, 20시즌 연속 4위를 기록하였지만 2018년 아스날과 그의 이별에서 상처를 입었다고 말했습니다.

 

벵거는 월요일 승리 후 드레싱 룸에 방문하여 선수들과 사진을 찍었고 아르테타는 앞으로도 벵거를 더 많이 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2018년 벵거의 사임 이후 벵거의 03/04 인빈시블 팀의 미드필더인 에두 가스파르가 스포르팅 디렉터로 있는 등 중요한 직위에 있던 사람들이 교체되었습니다.

 

벵거의 복귀에 대해 아르테타는 "저는 이 과정에 참여했지만 그가 필요한 타이밍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여기에 남아 기꺼이 우리와 더 많은 시간을 보냈으면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개인적으로 제 커리어와 경기를 접근하는 방식 뿐만 아니라, 이 클럽에도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벵거는 현재 피파의 글로벌 개발 책임자이지만, 감독으로 1235경기를 치룬 후 아스날은 "life and death"가 되었고 "아직도 나의 일부"라고 말했습니다. 벵거는 아스날을 떠난 후 프리미어리그에서 두 번의 감독 제안을 받았지만 아스날과 경쟁하는 것을 상상도 할 수 없었기에 모두 거절하였습니다. 또한 벵거는 아스날에 있는 동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바르셀로나, 레알 마드리드, 그리고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의 제의도 거절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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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8k 금으로 만들어졌다.

 

FIFA 월드컵 트로피는 높이 36cm, 총 무게 6.175kg이며, 18캐럿 금 5kg으로 제작됐다. 초록색 부분은 공작석으로 만들어졌다.

 

2. 트로피는 두 사람이 지구를 들어 올린 모습을 나타낸다.

 

월드컵 트로피는 두 명의 축구 선수가 승리의 순간을 만끽하며, 지구를 들어 올리고 있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월드컵이 전 세계인이 즐기는 최대의 스포츠 축제임을 트로피를 통해 느낄 수 있다.

 

3. 트로피 하단에 우승국 이름이 적혀있다.

 

매 대회마다 우승국 이름과 해당 연도의 숫자가 트로피 하단에 있는 17개 명판에 그 나라의 언어로 새겨진다. 이를테면 ‘2006 Italia’, ‘2014 Deutschland’ 식이다. 1974년부터 현재까지 총 11개의 우승국 이름이 새겨져 있으며, 2018 FIFA 러시아 월드컵을 기점으로 12번째 우승국이 새겨질 예정이다. 2038년에 명판이 모두 차게 되는데, 그 이후 새로운 트로피가 탄생할 가능성도 있다.

 


(▲ 줄리메컵(Jules Rimet Trophy) ©FIFA Museum)

 

4. 지금의 트로피가 최초의 트로피는 아니다.

 

첫 번째 월드컵 트로피는 프랑스 조각가 아벨 라플뢰르(Abel LaFleur)가 디자인한 것으로, 승리의 여신이 8각형의 성찬배를 손으로 받치고 있는 모양으로 만들어졌다. 월드컵 대회의 창시자이자 당시 FIFA 회장이었던 줄리메(Jules Rimet)의 업적을 기려 ‘줄리메컵(Jules Rimet Trophy)’이라 불린다. (지금의 트로피의 공식명칭은 FIFA 월드컵이다.)

 

5. 3번 우승하면 트로피를 영원히 소유할 수 있었다.

 

줄리메컵은 한 국가가 월드컵에서 3번 우승하면 영원히 소유할 수 있다는 규정이 있었다. 1970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브라질이 사상 처음으로 3번 우승하면서 줄리메컵을 영원히 소유하게 됐다. (지금의 FIFA 월드컵 트로피는 소유할 수 없다.)

 

6. 현재 트로피는 1974년 처음 공개됐다.

 

브라질이 줄리메컵을 소유하게 되면서, 이를 대체할 새로운 트로피가 필요해졌다. 멕시코 월드컵이 끝나고 FIFA는 1974년에 열릴 제10회 FIFA 월드컵 대회를 위해 새로운 트로피 디자인을 공모했다. 총 53개의 작품이 접수됐고, 그 가운데 지금의 트로피 디자인이 선정됐다. 제10회 월드컵은 서독(지금의 독일)에서 열렸으며, 우승도 서독이 차지했다.

 


(▲ 실비오 가자니가(Silvio Gazzaniga) © FIFA.com)

 

7. 이탈리아 작가가 트로피를 디자인했다.

 

FIFA 월드컵 트로피는 이탈리아 작가인 고(故) 실비오 가자니가(Silvio Gazzaniga)의 작품이다. 그는 UEFA(유럽 축구 연맹)컵, UEFA 슈퍼 컵, 21세 이하 및 23세 이하 UEFA컵 등 다양한 트로피들을 디자인했다. 그중에서도 역시나 월드컵 트로피가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8. 트로피를 거머쥐었던 나라는 총 8개국이다.

 

1930년부터 지금까지 총 22번의 월드컵이 열렸지만, 트로피를 거머쥐었던 나라는 독일(1954년, 1974년,1990년, 2014년 총 4회), 아르헨티나(1978년, 1986년, 2022년 총 3회), 이탈리아(1934년, 1938년, 1982년, 2006년 총 4회), 브라질(1958년, 1962년, 1970년, 1994년, 2002년 총 5회), 프랑스(1998년, 2018년 총 2회), 스페인(2010년 총 1회), 우루과이(1930년, 1950년 총 2회), 잉글랜드(1966년 총 1회) 등 8개국으로 압축된다.

 


(▲ 피클스(Pickles)가 트로피를 발견한 곳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Getty Images)

 

9. 첫 번째 트로피는 두 차례 도난 끝에 행방불명 됐다.

 

안타깝게도 줄리메컵은 두 차례 도난 끝에 행방불명 됐다. 첫 번째는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을 앞두고, 런던에서 전시회를 하던 중에 도난당했다. 우승컵 없이 월드컵을 치러야 하는 상황이 되면서, 전 세계가 발칵 뒤집혔다. 다행히 7일 뒤 트로피가 모습을 드러내는데, 런던 남쪽 지방에서 주인과 함께 산책을 나온 ‘피클스(Pickles)’라는 강아지에 의해 정원에서 발견됐다.하지만 비극은 다시 일어났다. 1970년 브라질이 월드컵 트로피를 영구적으로 소유하게 되면서 브라질 축구 협회 본부에 전시하게 되는데, 1983년에 도난당한 뒤로 영원히 찾을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현재 브라질은 복제품을 만들어 보관하고 있다.

 

10. 처음 트로피를 찾았던 강아지는 영화에 출연했다.

 

1966년 트로피를 찾아냈던 강아지 ‘피클스(Pickles)’는 같은 해 3월 29일 ‘The Spy with a Cold Nose’라는 코미디 영화에 출연했고, 4년 뒤 1970 멕시코 월드컵에도 초대됐다.

 


(▲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 승리한 독일 선수들이 트로피를 들어 올리며 환호하고 있다. (사진 출처: Facebook @trophytour))

 

11. 각 나라의 국가 원수 혹은 월드컵 우승 선수만 트로피를 만질 수 있다.

 

줄리메컵이 도난당한 뒤, FIFA는 ‘각 나라의 국가 원수나 월드컵 우승을 경험한 선수가 아니면 그 누구도 트로피에 손댈 수 없다’는 규정을 만들었다. 축구 선수들에게 월드컵 트로피를 만지는 것이 영광으로 여겨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12. 트로피는 약 3억 원의 보험에 가입되어 있다.

 

줄리메컵과 같은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FIFA는 월드컵 우승 트로피를 25만 스위스 프랑(한화 약 2억 7000만 원) 상당의 보험에 가입해두었다.

 

13. 월드컵 우승팀은 트로피 복제품을 받는다.

 

첫 번째 트로피였던 줄리메컵은 3번 우승한 국가가 소유할 수 있었지만 현재는 트로피 소유권이 완전히 FIFA에 있다. 즉, 우승해도 트로피를 가질 수 없다는 이야기다. FIFA 월드컵 우승국은 진품 트로피를 잠시 보관하다가, 도금된 복제품을 받는다.

 

14. 진품 트로피는 FIFA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FIFA 월드컵 트로피는 스위스 취리히에 위치한 FIFA 본사에 있다가, 2016년부터 FIFA 세계 축구 박물관(FIFA World Football Museum)에 보관되고 있다.

 


(▲ 사진 출처: 인스타그램 @trophytour)

 


(▲ 사진 출처: 인스타그램 @trophytour)

 


(▲ 2014년 한국에서 열린 FIFA 월드컵 트로피 투어 모습)

 

15. 일반인들이 트로피를 가까이서 볼 수 있도록 ‘트로피 투어’를 개최한다.

 

일반인들이 FIFA 월드컵 트로피를 눈앞에서 볼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을 것이다. FIFA 월드컵의 오랜 파트너사*인 코카-콜라는 2006년 독일 월드컵부터 ‘FIFA 월드컵 트로피 투어(FIFA World Cup™ Trophy Tour)’를 진행해오고 있다. 트로피 투어는 전 세계 축구팬들이 월드컵 진품 트로피를 직접 눈앞에서 보며 월드컵의 성공을 기원하고 감동을 나누는 행사로, 축구와 관련된 다양한 이벤트와 프로그램도 함께 즐길 수 있다. 올해로 4회째를 맞았다.

 

 

 

 

16. 트로피 투어를 위해 코카-콜라 비행기가 제작됐다.

 

FIFA 월드컵 트로피는 코카-콜라 비행기를 통해 전 세계로 운반된다. 

 

 

 

 

출처 : 코카콜라 코리아 홈페이지(https://www.coca-cola.co.kr/stories/sports/world-cup/interesting-facts-of-fifa-world-cup-tro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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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World Cup 2022 win does for Lionel Messi's legend (espn.com.sg)



킬리안 음바페는 승부차기에서 프랑스의 첫 키커를 맡아 골망을 흔들었다. 앞선 해트트릭에 이어서 4번째로 에밀리아노 마르티네스가 지키는 골문을 뚫어낸 순간이었다. 그에 이어서, 리오넬 메시가 아르헨티나의 포문을 열기위해 등판했다.

 

 

옛말에 따르면, 승부차기에서 최고의 키커는 마지막 순간이나 탈락의 위기에서 기용해야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번 결승전이나, 나아가서 이번 월드컵에서 그런 전통이나 지혜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메시는 골반에 손을 얹고 잠시 멈춰섰다가 이내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곧 그는 공과 프랑스의 골키퍼 위고 요리스를 정 반대 방향으로 날려버렸다. 이제 1 대 1이 되었고, 승부는 메시의 손을 떠나갔다. 그리고 아마도, 그곳엔 아주 큰 해방감이 있었을 것이다. 아르헨티나의 우승을 위해서 메시는 더 이상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이제는 열띤 응원과 주장으로의 역할만이 남았고, 메시는 포옹과 하이파이브로 아르헨티나의 다음 키커들을 마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곤살로 몬티엘이 패널티 킥을 성공하고 4 대 2 상황을 만들면서 아르헨티나는 챔피언이 되었다. 하지만 메시가 "이제 내 역할은 끝났다."라는 깨달음을 얻었던 순간은 그보다는 더 일렀을 것이다. 어떤 면에 있어선, 우리가 앞으로 길이길이 자손들에게까지 이야기 해줄 카타르의 일요일 밤은 메시에겐 월드컵 우승 실패라는 꼬리표가 마지막으로 따라다녔던 날이었다.

 

 

팀 스포츠에서 개인의 커리어라는 건 무척이나 독선적인 기준이다. 그리고 특히나 축구란 스포츠에선 더욱 이상한 일이다. 선수들은 최대 4~5번의 기회만이 있을 뿐이고, 만약 운이 좋다면 아주 어린 나이에 첫 기회가 올 수도 있지만 또 마지막 기회의 순간엔 이미 너무 늙어 있을지도 모른다. 대회가 진행되는 순간에 컨디션이 좋다는 보장도 없고, 클럽 축구처럼 국적을 선택할 수 없기에 주변 동료들의 수준에 기대야만 한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에겐 월드컵 우승이 없다. 요한 크루이프도, 그리고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도. 

 

 

이번 우승이 메시의 GOAT 여부를 결정짓는 요소는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지난 시간동안 메시를 가려왔던 부당한 구름이 걷히는 순간이라는 점이다. 

 

 

메시의 아르헨티나 국가대표 데뷔전은 단 2분만에 끝났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하나의 징조같았다. 2005년 여름, 바르셀로나의 영재였던 18살의 메시는 63분만에 교체로 데뷔전을 치루게 되지만, 이내 팔꿈치로 상대 선수를 가격하고 2분만에 퇴장당하게 된다. 

 

 

메시의 커리어가 활짝 꽃 피우고, 클럽엔 우승 트로피를, 본인은 발롱도르를 쌓아나갔던 순간에도, 또 아르헨티나의 최다 골 기록을 다시쓰고 (2016년) 최다 출장 기록을 경신 했을 때도 (2021년 여름) 언제나 그에겐 의심의 시선이 함께했었다. 아르헨티나엔 언제쯤 우승 트로피를 가져다줄 수 있을까? 

 

 

실제로 아르헨티나의 어떤 사람들은 메시에게 간절함이 부족하다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결국 메시는 13살에 아르헨티나를 떠나 바르셀로나에 정착한 사람이니까. 그리고 2016년, 코파 아메리카 결승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메시는 축구협회와 이견이 있었음을 밝히면서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한다. 전국적으로 메시의 복귀를 바라는 캠페인이 있었고, 이는 메시의 애국심에 대해 의심하는 불합리함의 민낯을 밝혀냈다. 그리고 결국 2018년 러시아 월드컵 진출권을 따내기 위해, 메시는 돌아오게된다.

 

 

그럼에도, 메시에게 있어서 국가대표 커리어는 큰 오점이었다. 4번의 코파 아메리카와 3번의 월드컵에서 준우승만 3번. 후회와 '이랬으면 좋았을텐데'하는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메시의 팬들은 2019년 코파 아메리카가 터닝포인트였다고 지목한다. 아르헨티나는 개최국 브라질에게 4강에서 무릎꿇게 된다. 그리고 경기가 끝난 이후, 메시는 메시 답지 않았다. 그는 심판을 비난했고, 이전에는 거의 볼 수 없었던 날카로운 모습들을 연출했다. 메시는 이미 몇년 전에 아르헨티나의 주장을 맡기 시작했지만, 이런 화나고, 비꼬는 모습의 왈패 메시는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네덜란드전 이후에도 이 메시가 나왔는데, 베호르스트에게 "뭘 꼬라봐 바보야"라는 말을 했다."

 

 

2021년 여름, 메시는 드디어 그동안 등에 지고있던 국대 무관의 저주를 떨쳐내고 조국을 코파 아메리카 우승으로 이끌게 된다.

 

 

어떤 부분에 있어선, 지난 여름에 있었던 모든 일들은 이번 월드컵 우승의 전주곡처럼 느껴진다. 아르헨티나의 감독 리오넬 스칼로니는 2010년의 마라도나나 2018년의 삼파올리와 다르게 선수들에게서 언론플레이와 멘탈 흔들림을 막아내는데 성공했고, 아르헨티나는 긴 무패행진을 이어가면서 메시 의존도를 줄이는 시스템을 장착하는데 성공한다. 메시는 팀의 승리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맡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팀의 전체는 아니었다. 또 PSG에서 네이마르나 음바페와 같은 스타 선수들과 뛰는 부분이 메시가 받는 스포트라이트를 일정부분 줄여주기도 했다.

 

 




이제는 모든 것이 메시의 월드컵 우승이라는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기란 어렵지 않을테지만, 그것이 지금까지 메시가 아르헨티나를 어떻게 이끌어 왔는지 잊어버리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

 

 

사우디아라비아에게 첫 경기를 패배한 아르헨티나에게 있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경기였던 멕시코 전에서 메시는 0 대 0의 균형을 깼다. 그리고 결승까지 토너먼트를 진출하는 과정에서 모든 경기 득점을 올렸다. 결승전 프랑스를 상대로는 1 대 0을 만드는 첫 패널티를 성공시켰고, 역습의 기점 역할을 하면서 2 대 0을 만드는데 공헌했으며, 연장전에선 몬티엘이 핸드볼 반칙을 저지르지만 않았다면 결승골이 되었을 재역전골을 넣기도 했다.

 

 

해트트릭을 기록한 음바페를 상대로 승리를 거뒀다는 점은 아주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이건 현재를 두고 싸우는 '곧 과거의 유산이 될 사람'과 '다가오는 미래'의 대결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메시의 현재'였다.

 

 

GOAT 논쟁에 있어서 메시에게 월드컵은 사실 필수적인게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메시는 22년의 해외생활을 보내면서도 조국과 동료들에게 우승컵을 선사하고자 노력했다. 메시가 아르헨티나에 빚을 졌기 때문이 아니라, 메시가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어떤 사람들은 메시가 이번 월드컵에서 우승했기에 그를 축구계 GOAT위치에 둘 수도 있다. 모두에겐 각자의 기준이란게 존재하는 법이니 그들을 존중한다. 

 

 

사실 필자에게 있어서, GOAT란 것은 단순히 기록으로 비교할 수 있는게 아니다. 그건 마치 사과와 돼지를 비교하는 것과 같다.

 

 

메시는 챔피언스 리그에서 4번 우승했다. 하지만 펠레는 브라질 정부가 펠레의 해외 이주를 막기위해 출국을 금지시켜서 챔피언스 리그에서 (당시 기준으론 유러피안 컵) 뛸 기회조차 없었다. 그리고 마라도나의 시대에 챔피언스 리그를 뛰기 위해선 단지 리그에서 4위 안으로 마감하는게 아니라 1위를 차지했어야만 했다.

 

 

펠레의 커리어 대부분 동안, 그는 전세계 각곳에서 모인 최고 수준 동료들의 지원을 받지 못 했다. 그리고 이건 한 클럽에 3명의 외국인 선수만 보유할 수 있던 마라도나도 마찬가지였다. 메시는 엄청나게 양극화 된 시대에서 살고 있다. 그가 뛰었던 바르셀로나, 그리고 PSG같은 메가 클럽은 때때로 상대팀보다 10배, 20배, 30배 혹은 40배에 달하는 자금을 가지고 있었다.

 

 

또 당대의 기록들만 세울 수 있기에 성취와 위대함을 혼동하는 경우가 있다. 월드컵에서 우승하는 것은 '성취'지만 그렇다고 그게 '위대함'으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현대의 선수들이 더 좋은 경기장, 발전한 스포츠과학, 우수한 유전자, 개량된 훈련 등으로 더 낫다고 이야기하는 단순한 길을 택할 수는 없다. 1968년의 바비 찰튼 경을 지금 시대로 데려온다면 아마도 해리 케인이 그보다 훨씬 더 좋은 선수일 가능성이 무척이나 높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바비 찰튼이 물로켓이란 의미인가? 내 사전에선 절대 아니다.

 

 

누군가에게 있어, 위대함이란 기준은 무척이나 추상적이다. 펠레와 마라도나는 각각의 방식으로 메시에게는 없는 카리스마와, 존재감 그리고 사회적 영향력이 있었다. 그건 메시가 축구선수로서 그들보다 부족해서가 아니라, 성정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때때로 위대함과 성격은 떼어놓을 수 없다. 만약 무하마드 알리가 그저 "캐시어스 클레이" (무하마드 알리 본명)로 남아서 인터뷰도 지루하고 정석적으로 임하고, 사회적 이슈에 대한 발언도 자제했다면 그가 "가장 위대한 선수"로 남을 수 있었을까? (스스로를 변화시킨 부분에 있어선 알리를 존경하지만, 무슨 뜻인지 이해했으리라 믿는다.) 

 

 

메시는 월드컵 우승을 통해서 여러 기준을 통과하게 되었다. 내 논리에 들어맞지는 않지만. 나? 나는 그저 이 위대한 선수가 보답받았다는 부분에 아주 행복하다. 하지만 메시는 단지 그의 발에 공이 있던 순간만 위대했던게 아니다.

 

 

이번 대회를 복기하자면, 리오넬 스칼로니 감독은 '신뢰', '동료들에게 본인의 운명을 맡긴다', 그리고 '그들을 믿는다'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했다. 그리고 이건 메시가 월드컵 내내 보여줬던 자세며, 특히나 승부차기를 성공시키고 센터써클로 돌아오는 모습에서 가장 강조되었던 부분이기도 하다.  

 

 

메시는 동료들에게 믿음을 주었고, 동료들은 메시가 이때까지 그들에게 해왔던 것처럼 메시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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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istiano Ronaldo. Yesterday’s man - The Athletic

 

경기 종료 휘슬이 울렸을 때, 월드컵 8강전뿐만 아니라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평생의 야망에도 종료 휘슬이 불렸다.

 
포르투갈의 가장 위대한 축구 선수인 호날두는 이제 결코 월드컵에서 우승하지 못할 것이다. 호날두는 최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결별한 후 곧 38세가 될 예정이다. 현재 가장 유력한 행선지는 사우디 아라비아 리그로 보이며 심지어 2026년 여름 41세의 나이로 월드컵에서 한 번 더 기회를 받을 수 있다고 기대하는 자신감이나 어쩌면 망상도 가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결국, 월드컵 탈락은 최근 가까운 곳에서 호날두를 관찰한 모든 사람들에게 지긋지긋할 정도로 익숙했다.
 
호날두는 포르투갈이 모로코에 1-0으로 패한 후 경기장을 떠난 첫 번째 선수였다.
 
자신에게 달려드는 난입한 팬을 거의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같았고, 이 토너먼트 탈락에 멍해졌다.
 
터널 안에서 카메라들은 국가대표 최다 득점자 기록을 가지고 있는 호날두가 스포츠 최고 권위 트로피를 들어올리지 못하고 물러서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포착했다. 그리고, 마음속 깊이, 호날두는 또한 자신의 가장 큰 라이벌인 리오넬 메시가 앞으로 8일 동안 영광의 자리를 차지할 기회가 남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호날두에게 이것은 겸손한 월드컵 시즌 동안 또 다른 초라한 경험이었다.
 
이 초라함은 올드 트래포드에서 두 번째 기간이 끝나는 것으로 시작되었고 명성이 더욱 떨어짐으로써 끝이 난다.
 
아마도 그날 밤 가장 주목할 만한 통계는 국가대표 최다 득점자 호날두가 월드컵의 토너먼트에서 단 한 골도 넣지 못한 채 선수 생활을 끝낼 것이라는 사실일 것이다.
 
열렬한 팬들이 이번 세대에서 가장 위대한 축구선수라고 주장하는 선수에게는 놀라운 사실이다.
 


호날두는 8번의 월드컵 토너먼트에 출전했지만, 이번 대회 동안 16강 스위스와 토요일 모로코를 상대로 한 두 번의 출전은 대체 교체 출전이었다.
 
호날두에게 이번 임무는 스위스와의 경기에서 교체 투입됐을 때와는 매우 달랐지만, 두 경험 모두 개성이 독특한 선수에게는 고문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페르난도 산투스 감독이 스위스와의 경기에서 호날두를 선발 명단에서 제외했을 때 대신 출전한 곤살루 하무스가 해트트릭을 기록해 이 선택을 전적으로 입증했다. 이 경우 호날두는 포르투갈이 골을 내준 후 교체 투입된 것이 자신이 원하는 것보다 늦었다고 느꼈을 것이다. 호날두는 39분을 남겨두고 투입됐다.
 
하지만 호날두가 투입됐을 때도 팀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했다. 5개의 패스만을 시도해 3개를 성공했다. 공을 10번 잡았는데, 그 중 3번은 모로코 페널티 지역에서였다.
 


호날두는 단 한 번의 골 찬스를 맞았는데, 이 낮게 찬 공도 야신 부누가 막았다. 호날두의 존재는 동료들이 예리한 전진 플레이 대신 크로스 의존 플레이로 눈을 돌렸기 때문에 인내심을 줄이고 절박함을 더 부추기는 것 같았다.
 
또 다른 노장 페페(39)는 후반 헤딩슛으로 동점골에 가장 가까이 다가섰으나 빗나갔고, 모로코 수비수 자와드 엘 야미크는 공이 빗나가는 것을 보고 페페 머리에 뽀뽀할 정도로 겁을 먹었다.
 


엘 야미크는 현재 레알 바야돌리드에서 뛰고 있는 저니맨이다. 레프트백에서는 야히아 아티야트 알라가 뛰어났고, 그는 모로코 리그 와이다드 카사블랑카에서 뛰고 있다. 여러 면에서 아무도 누군가가 되지 않는 위대한 평준화인 월드컵의 아름다움을 보여줬다.
 
아티야트 알라와 같은 선수가 호날두와 같은 엄청난 명성을 극복할 수 있는 곳. 2부 리그로 강등된 번리에서 임대로 팀을 떠난 네덜란드의 바웃 베르호스트와 같은 선수가 아르헨티나의 리오넬 메시를 절망의 지경으로 몰아갈 수도 있었을 뻔한 순간.
 
물론 모로코는 이번 월드컵 5경기에서 크로아티아, 벨기에, 스페인, 포르투갈을 상대로 클린 시트를 기록하며 강력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스페인과의 경기에서 유효 슈팅 하나를 내줬고, 포르투갈에게는 세 개를 내줬다. 호날두는 이제 피니셔에 불과하고 이번 시즌에도 불규칙했지만, 여기서 호날두는 기회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팀에서 뛰었다.
 
포르투갈은 변명을 위해 허둥댔다. 페페는 아르헨티나 심판 파쿤도 텔로를 비난했다.
 
페페는 "우리는 우리가 예상하지 못했던 골을 허용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꼭 말하고 싶습니다. 아르헨티나 심판이 이 경기 휘슬을 불었다는 것은 받아 들일 수 없습니다. 어제 메시와 있었던 일 이후로 말이죠."라고 말했다.
 
"아르헨티나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들 보고, 심판이 이 경기를 관장했습니다. 심판이 편파를 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후반전에 어떤 플레이를 했나요? 상대 키퍼는 항상 땅에 몸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심판은 단지 8분이 더 걸렸다고 말했죠. 우리는 진지하게 뛰었는데 이 심판은... 8분?"
 
포르투갈의 미드필더 브루노 페르난데스는 아르헨티나가 대회에 남아 있을 때 아르헨티나 심판이 주심을 맡아야 한다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페르난데스는 "아르헨티나에 트로피를 줄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때, 포르투갈 언론 담당자가 페르난데스의 팔을 건드렸지만, 페르난데스는 "상관없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것을 말하고 그렇게 해야죠. 아직 경쟁 중인 나라 출신의 심판이 주심을 하는 것은 정말 이상합니다. 분명히 우리에게 불리하게 판정이 내려졌죠."라고 말했다.
 
산투스 감독은 좀 더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우리는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었고 그렇게 하지 못했기 때문에 심판을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그건 말이 안 돼요."
 
산투스가 내일 아침 SNS의 특정 유저들, 특히 호날두의 애인인 조지나 로드리게스의 계정을 피하고 싶어했을지도 모른다. 조지나는 산토스가 처음부터 호날두를 선발하지 않은 것을 잘못했다고 말했고,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선수를 과소평가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경기 후 기자회견에서 산투스는 전혀 후회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산투스는 "후회는 없습니다. 스위스를 상대로 매우 잘한 팀을 선발했다고 생각합니다. 호날두는 훌륭한 선수예요. 우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때 투입됐으니, 후회는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산투스에게 있어, 포르투갈을 위해 현재와 미래가 이 대회의 많은 부분을 지배하고 있는 호날두에 대한 질문을 받지 않고 이제 몇 주를 쉴 수 있다는 안도감이 있을 것이다.
 
영국 방송인 피어스 모건과의 인터뷰는 월드컵을 앞두고 많은 헤드 라인을 장식했으며, 대회가 시작되기 불과 며칠 전에 맨유와의 계약 해지가 확정됐다.
 


호날두는 첫 경기에서 가나를 상대로 페널티킥으로 득점하는 등 긍정적인 순간을 몇 번 가졌다. 그렇게 함으로써, 5번의 월드컵에서 득점을 한 최초의 선수가 되는 놀라운 위업을 달성했다.
 
하지만 이번 시즌에 호날두의 유일한 골은 유로파 리그에서 셰리프를 상대로 두 번, 프리미어리그의 에버튼을 상대로 한 번 나왔다.
 
산투스는 호날두의 충성파로 남아 있었지만, 경기 전 기자회견에서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고, (옆에 앉아 있던)페르난데스가 전 맨유 팀 동료에 대해 또 다른 답변을 해야 할 때 의자에 몸을 기대고 한숨을 쉬기도 했다.
 
호날두는 우루과이를 상대로 골을 넣으려 했고, 또 자신이 골을 넣었다고 생각했지만, FIFA의 기술은 골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후 호날두는 한국과의 경기 후반전에 교체되는 것에 대해 심술궂게 반응했다. 검지 손가락을 입술에 댔고, 나중에 상대 스트라이커 조규성이 빨리 나가라고 말한 것에 짜증이 났다고 설명했다. "그에게 입을 다물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말 할 권한이 없죠. 그는 아무 말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산투스는 호날두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했고, 처음으로 과감한 결정을 내려 지구상에서 가장 유명한 선수를 벤치로 내릴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느낌은 스위스 경기 전 점심시간 회의에서 결실을 맺었다. 산투스는 "호날두를 사무실로 불렀습니다. 항상 선발 선수였기 때문에 그것에 만족하지 않았죠. 호날두는 제게 '좋은 결정이라 생각하세요?'라고 물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번 모로코와의 경기에서 패배한 후, 호날두가 지금 어떤 다른 감정을 느낄 것이라고 믿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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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와 메시에게는 아직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모두 멕시코와의 경기에서 우리가 득점할 때까지 겪은 긴장과 불안감, 그리고 또한 2-0으로 승리한 후 마지막 휘슬에 대한 안도감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사우디아라비아에 패한 후 우리에게는 많은 압박감이 있었고, 그 안도감은 모든 사람들, 팀 전체와 여기 있는 모든 우리 팬들, 그리고 특히 메시에게 있었습니다.

 

아마 그의 마지막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가 조별리그에서 탈락하는 것을 보는 건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결말이었을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16강에 있지 않습니다. 폴란드를 상대로 다시 승리해야 해낼 수 있습니다.

쉽지 않고, 팀은 여전히 더 향상되야 하지만 다행히 우리는 멕시코를 상대한 후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아르헨티나가 토너먼트에서 더 나아가는 것은 힘들것이라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아르헨티나 팀에 대해 다시 꿈꿀 수 있습니다. - 왜냐면 메시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월드컵이 메시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습니다'

 

저는 메시가 아르헨티나 대표팀 여정을 시작하는 곳에 함께 있었고, 그가 이번 월드컵 트로피를 들어올리면서 대표팀의 여정을 마무리할 수 있기를 매우 바랍니다.

 

우리가 20세 이하 대표팀을 위해 함께 했던 첫 훈련에서 그가 공을 터치하는 것을 봤을 때, 나는 그가 매우 특별한 선수가 될거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물론 그를 만나기 전에 바르셀로나에서의 메시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있지만, 그가 아르헨티나를 위해 뛰러 온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으니까요. 그 때 그는 말을 많이 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아주 따뜻하게 팀에 맞아주었고, 그가 얼마나 훌륭한지 빠르게 깨달았습니다.

 

그는 17살일때 네덜란드에서 열린 2005 U-20 월드컵에 우리와 함께 나갔습니다. 저는 당시 주장이었고 우리는 토너먼트에서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메시와 함께 팀동료로서, 그리고 친구로서 그와 많은 순간을 공유한, 그의 세대의 일부가 됐다는 것이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가 겪은 희생과 그가 겪은 힘든 시간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잊지 마세요. 그가 스페인으로 이주 했을때의 나이는 불과 13살이었다는것을요.

 

저 또한 제 커리어를 위해 어린 나이에 아르헨티나를 떠나야 했습니다. 적응하는데 얼마나 힘들었는지 잘 알고 있지만 제가 세비야에 합류했을 때는 저는 20살이었고 메시는 그저 어린 소년이었어요.

 

이후 그가 인생에서 했던 모든 것이 자랑스럽지만, 그가 아르헨티나를 대표하는 것이 얼마나 의미가 있는지, 그리고 우리와 함께 축구에서 가장 위대한 트로피를 들어올리고 싶어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항상 똑같아요. 메시는 월드컵에서 우승해야만 합니다'

 

지금이야 고국에서의 메시에 대한 애정이 많지만 항상 이렇지는 않았습니다.

 

2014년 월드컵 결승전에서 패한 후 우리는 코파아메리카 2015와 2016 또다른 두 개의 결승전에서도 패배했습니다.

몇몇 사람들과 우리 언론의 일부에게, 단지 결승전에 도달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당시 메시가 바르셀로나에서 했던 것처럼 우리가 모든 것을 쟁취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메시에 대한 비판이 많았습니다.

 

이후 대표팀을 포기하고 재충전의 시간을 가졌지만 그는 대표팀이 자신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빠르게 깨달았습니다.

메시는 다시 돌아와 우리가 이기는 것을 돕기 위해 필사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작년 코파 아메리카에서 그의 첫 메이져 트로피를 차지한 것은 매우 놀라웠습니다.

 

그 우승은 그의 부담감을 조금 덜어주었고, 그가 클럽에서 뛰던 방식으로 우리를 위해 뛰지 않았다고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멈췄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사람들은 월드컵에서 메시에게 많은 것을 기대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대회가 메시에게 정신적으로 힘든 시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것은 그가 릴렉스 할 수 있도록 도와줄 적절한 사람들을 두는 것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무엇이 바뀌었는가? 메시는 성숙해졌다.'

 

2018년 월드컵 당시 저는 러시아에서 BBC 전문가로 있었는데, 멀리서도 메시가 스트레스를 받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매우 걱정이었습니다. 그 팀은 좋은 위치에 있지 않았고 일찍 탈락했습니다.

 

제가 그와 함께 있었던 2014년 브라질에서 결승에 오른 아르헨티나 대표팀하고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는 당시 팀을 이끌고 있었고 팀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이번 대회가 시작되기 전에 메시가 그때 느꼈던 기분과 지금 선수단의 분위기가 비슷한 점이 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건 정말 좋은 징조인데 그것은 같은 연대감이 있다는 걸 의미하고, 또한 그가 행복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메시가 말을 할때는 모두가 듣습니다. 2014년에도 마찬가지였죠. 하지만 메시는 항상 조용했고 많은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우리의 주장이었지만 그의 경험과 성격 때문에 하비에르 마스체라노가 그 역할을 대신 맡았었죠. 마스체라노는 경기 전 라커룸에서 우리를 준비시키는 목소리가 아주 큰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그것을 하는 사람은 메시 자신입니다. 그는 우리의 최고 선수일 뿐만 아니라 최고의 리더입니다.

그리고 그는 골을 넣는 것만이 아니라 그런 방식으로 이 어려운 시작을 헤쳐나갈 수 있도록 동료들을 도울겁니다.

35세인 메시는 더 성숙하고, 더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고, 가정적인 남자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놀라운 축구선수죠.

 

만약 메시가 이번 월드컵에서 우승한다면, 그는 가능한 모든 것을 이뤘기 때문에 바로 은퇴해야 합니다.

그가 쟁취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을테니까요.

 

 

https://www.bbc.com/sport/football/636968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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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이먼 스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구단주들은 화요일 밤 구단 매각을 포함한 “전략적 기회를 탐색 중”이라고 발표하면서 전 세계에 충격을 선사했다.
 
글레이저스는 2005년 레버리지를 통해 맨유에 도착한 순간부터 여전히 구단이 £514.9M의 부채를 가지게 만들었고 이자와 배당금 지불로 £600M 이상을 쓰게 만들었다. 팬들은 이것을 지적해 왔으며 글레이저스가 떠날 것을 거의 20년 동안 기다려 왔다.
 
그러나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확실하지 않다.
 
맨유는 이적료와 임금에 많은 돈을 썼지만 2013년 알렉스 퍼거슨 경이 은퇴한 이후 메이저 트로피를 향한 도전에 실패해왔고 가까워지지 않았다.
 
BBC Sport는 이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아 보고자 한다.
 
 
 
 
그들은 왜 지금 팔고 싶어할까?
 
맨유는 이미 올드 트래포드에 상당한 자본 지출을 약속했다. 4월에 그들은 마스터 플래너를 임명했지만 변경 사항의 범위에 대한 결정을 여전히 내려야 한다. 그리고 9월, CEO 리처드 아놀드는 구단이 “우리의 자본 계획에 있어 규칙을 지켜야 한다”라고 말했다.
 
즉, 완전히 새로운 경기장을 짓는 것부터 현재의 구조를 수정하는 것까지의 궁극적인 변화에는 외부의 자금을 필요로 할 것이다.
 
현금이 풍부한 뉴캐슬과의 경쟁 심화, 에릭 텐하흐의 스쿼드에 투자하기 위해 필요한 자금, 이번 여름 예상보다 훨씬 비싼 금액에 매각된 첼시, 유럽 슈퍼리그의 백지화 등 추가적인 전망을 고려할 때 글레이저 가문이 구단을 팔아 얻을 수 있는 것을 테스트하기 적절한 시기라고 생각된다.
 
 
 
 
누가 맨유를 살 수 있을까?
 
40억 파운드라는 수치는 글레이저스를 협상 테이블로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라고 한동안 알려져 왔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먼저 테이블에 와서 제안을 받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현실적으로 그 정도 규모의 자금을 가지고 있는 소스는 많지 않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중국 정부의 정책으로 인해 러시아나 중국이 개입할 가능성은 없다.
 
사우디아라비아는 뉴캐슬에 전념하고 있고, 카타르 스포츠 인베스트먼트는 PSG를 매각해야 할 것이며, 반면 두바이와 바레인은 걸프 지역에서 투자에 있어 비길 데 없는 나라들이다.
 
글레이저스는 지난해 인도 프리미어리그 프랜차이즈를 놓쳤지만 현재 인도와 접촉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맨유가 인도에 약 3500만명의 팔로워를 보유하고 있으며, 코로나 팬대믹으로 인해 취소되긴 했지만 구단은 2020/21 프리시즌 투어의 일환으로 인도에 방문할 예정이었다.
 
Ineos의 오너 짐 래트클리프 경은 어린 시절부터 맨유의 서포터였으며 이전에 글레이저스와 대화할 의사를 내비쳤다. 수요일에 텔레그래프는 70세의 그가 입찰을 준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래트클리프가 매우 부유하긴 하더라도 그가 혼자서 이와 같은 거래를 성사시킬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아마도 그것은 더 많은 미국인들의 투자를 필요로 할 것이다. 첼시 매각이 어떠한 지침이 된다면, 필요할 것으로 예상되는 금액을 감안할 때 사모펀드 그룹이 참여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한편, 파이낸셜 타임즈는 전 맨유의 윙어 데이비드 베컴이 “잠재적인 입찰자와 대화할 의향이 있다”라고 보도했다.
 
 
 
 
어떤 구단주가 팬들에게 받아들여질까?
 
맨유 팬들은 마틴 에드워즈 전 회장이 구단을 런던 증권 거래소에 상장했을 때 비난했으며, 이웃 맨체스터 시티가 구단주의 엄청난 투자로 이익을 보고 있던 시기에 구단의 막대한 돈을 빼돌린 글레이저스에 대해서도 분명히 비난했다.
 
존경받는 경제학자이자 맨유의 평생 팬, 그리고 2010년 구단 인수를 시도했던 레드 나이츠 그룹의 중요한 존재였던 짐 오닐은 “맨유에서 가장 오래된 친구들 중 2명이 ‘네가 바라는 것을 조심해라’라고 말했다.”고 말했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이 맨유의 그 어떤 구단주도 좋아한 적이 없다고 지적한다.”
 
“정말 조심해야 하지만 매우 복잡하다. 맨유의 브랜드는 겉보기에는 끝이 없어 보인다. 놀라운 명성을 가지고 있고 누군가는 아마도 그들을 팔게 할 미친 가격을 지불할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서포터즈 트러스트 (이하 MUST)는 그들이 원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MUST : “지난 17년은 경기장 안팎에서 부채와 쇠퇴로 특정지어졌다.”
 
“맨유 팬들 대다수는 글레이저스도 이제 끝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는 결론에 동의할 것이다. 이제는 변화가 필요한 때이다.”
 
"팬들은 새로운 구단주를 면밀히 조사하기를 원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맨유의 가장 큰 자산인 팬들을 소외시키는 실수를 반복하지 말 것을 간청한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그것이 걸리는 시간만큼’이라고 말하는 것이 꽤 명백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이 현실이다.
 
이 과정에 대한 빠른 결론은 의심할 여지 없이 환영받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규모와 복잡성이 큰 다른 매각건과 마찬가지로, 제안이 들어오기 시작할 때까지는 해결하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많은 개개인이 구단 운영에 중요한 발언권을 가지지 않고 막대한 금액을 기꺼이 지불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것들이 존재할 수도 있고, 이것이 바로 전면적인 매각과 반대되는 추가적인 신규 투자를 아직은 완전히 배제할 수 없는 이유이다.
 
글레이저 가문은 단지 최고 입찰자에게 판매하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잠재적인 구매자의 배경을 고려할 의향이 있는건가? 그들은 선불을 원하는가? 아니면 그들이 할부를 받을 것인가?
 
이 모든 요소들은 거래가 체결되는 속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동안 텐하흐는 필요한 자금을 받을 수 있을까?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즉각적인 이탈이 화요일 밤 글레이저의 발표 몇 시간 전에 컨펌된 후, 맨유는 그들의 포워드 라인을 강화할 필요가 상당히 명백해졌다.
 
그러나 적절한 수준의 스트라이커가 많지 않은 것이 분명하며, 1월에도 여전히 적은 것이 분명하다.
 
만약 텐하흐가 그의 스쿼드에 영입이 필요하다면, 구단의 소유권이 불확실한 현재 그 돈은 어디서 나올 것인가?
 
지난 8월 Fan Share Scheme을 통해 맨유의 구단주들과 철저한 협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MUST는 “우리는 당신들이 신속하게 움직일 것을 간청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축구에서 어떤 종류의 공백이나 불확실성은 재앙이다. 
 
“매각을 결정했다면 구단이 지체없이 인수될 수 있도록 신속하게 진행하기를 요청한다.”
 
 
 
 
매각이 확실하게 이루어질까?
 
확실하지 않다. 오닐은 그렇게 생각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는 글레이저의 소유권에 대한 변화가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변화가 불가피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성명에 대한 주목을 감안할 때, 글레이저스가 매각할 수 없다면 그들은 앞으로 맨유의 소유권을 관리하는 방식을 상당히 극적으로 변화시키고 구단 전체에 몇 가지 공통된 목적과 문화를 도입해야 한다.”
 
“호날두 에피소드는 그들이 어떻게 구단을 운영하고 싶어했는지를 보여주는 또 다른 멍청한 예시이다.”
 
 
 
 
텐하흐는 어떨까?
 
토마스 투헬은 여름의 격변 이후 오래 가지 못했고 대부분의 구단주는 어느 시점에서 감독을 바꾸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글레이저 가문은 알렉스 퍼거슨 경을 바꾸지 않았다. 그의 기준에 따르면 맨유가 2005년 인수됐을 때 상태가 좋지 않았다.
 
호날두의 이탈에서 구단은 텐하흐에게 막대한 지원을 제공했다. 단기적으로 그의 입지가 의심받는 것은 이상할 것이다. 
 
그리고 MUST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은 맨유의 최선의 이익을 위해 변화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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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사다난한 한 주 동안 점점 더 분명해진 것은 루머의 끝이 아니라 과정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구단주인 펜웨이 스포츠 그룹은 리버풀 풋볼 클럽을 매물로 내놓았고, 이제 누가 관심을 가지는지 기다리고 있다.

 

미국 은행 골드만삭스와 모건 스탠리는 관심을 모으는 역할을 맡았다. FSG는 오랫동안 올바른 투자에 대한 대가로 리버풀의 소수 지분을 매각하는 것에 개방적이었다. 이번 차이점은 모든 지분을 매각하는 옵션도 있다는 것이다.

 

프리미어리그 라이벌인 첼시가 지난 5월 LA 다저스의 구단주 토드 볼리가 이끄는 컨소시엄에 25억 파운드(30억 달러)에 매각된 것을 본 FSG는 잠재적 구매자들이 지불할 금액이 확실하기를 원한다. 가치는 30억 파운드에서 40억 파운드 사이다.

미래는 불확실하다. FSG는 지분을 줄일 것인가, 혹은 12년 안필드 통치의 막을 내릴 것인가?

 

다음에 일어날 일은 제안의 규모와 FSG가 공개적, 비공개적으로 "구단으로서 리버풀의 최선의 이익"을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확신을 제공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입찰자의 신원에 따라 다르다. FSG에게 유산은 중요하다. 단지 돈만 가지고 달아나지 않을 것이다. 서두르고 있지도 않다.

 

비공개 계약에 서명하고, 판매 문서가 발송되고, 실제 인수가 시행되어야 하므로 빠른 해결이 이루어지지는 못한다. 업계 전문가들은 현 상황이 2023년과 그 이후에도 계속될 것이라고 예상한다.

 

많은 서포터들에게 불타는 질문은 이 모든 것이 리버풀의 리빌딩에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이다. FSG가 단독으로 자금을 조달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린 것일까? 이적 시장에서 충분한 돈을 투자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아온 FSG가 상황이 해결 될 때까지 자금을 투입하는 것을 더 꺼려할까?

 

이번 시즌 초반 리버풀의 놀라운 부진은 현 스쿼드가 쇠퇴하고 있는 것인지, 단순히 전성기의 끝에 도달한 팀인지에 대한 논쟁을 촉발했다. 위르겐 클롭은 그런 말에 동의하지 않으며, 8월 이후 방해가 된 선수들의 부상을 문제로 지적한다. 클롭은 이미 처리에 있어서의 재능으로 이번 시즌에서 여전히 이룰 수 있는 것에 대해 낙관적이다.

 

그러나 다음 두 번의 이적 시장 동안 많은 영입이 필요할 것이라는 사실을 피할 수는 없으며, 특히 리버풀의 중원은 대대적인 개편이 필요하다.

 

나비 케이타, 알렉스 옥슬레이드-체임벌린, 제임스 밀너는 내년 여름 계약이 만료된다. 허벅지 부상으로 이번 시즌 단 13분만 뛴 아르투르 멜루는 유벤투스에서 임대 기간이 끝나면 잔류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 다음 시즌, 주장 조던 헨더슨은 33세, 티아고는 32세가 된다.

 

 

 

하비 엘리엇은 계속해서 위상을 높이고 있고 리버풀은 아카데미의 스테판 바세티치에 대한 높은 기대를 가지고 있지만, 바세티치의 발전이 빠르더라도 2023년에는 세 명의 주전 미드필더를 영입해야 한다.

 

특히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미드필더 주드 벨링엄 영입전에서 승리하기를 원한다면, 스쿼드의 약점을 해결하는 데에는 많은 비용이 들 것이다. 레알 마드리드, 맨체스터 시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도 벨링엄을 원하고 있기 때문에 클롭이 그토록 좋아하는 벨링엄을 영입하려면 1억 파운드가 넘는 클럽 레코드 이적료가 필요할 것이다.

 

리버풀은 틀림없이 다른 공격수도 필요하며, 특히 호베르투 피르미누의 에이전트와의 협상이 성공적인 결론에 도달하지 못할 경우 더욱 그렇다. 피르미누는 또한 2023년에 FA다.

 

FSG가 새로운 투자를 모색하는 것은 당연하다. 맨체스터 시티와 같은 국영 클럽과 경쟁하는 일은 더 이상 쉽지 않을 것이다. 리버풀이 우승을 놓고 계속 경쟁하려면 더 많은 투자가 필요하다.

 

구단주 존 헨리는 최근 몇 년 동안 더 많은 힘과 돈을 확보하려는 시도에서 프로젝트 빅 픽쳐의 종말과 운명의 유럽 슈퍼 리그의 실패로 인해 좌절을 겪었다.

 

리버풀을 인수한 이후 FSG는 FFP를 열렬히 지지해 왔으며 이를 적절하게 시행하지 못한 것은 보스턴에서 엄청난 좌절의 원인이 되었다. 리버풀은 2020년 UEFA의 구단 재정 통제 기관에 의해 심각한 FFP 위반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후 스포츠 중재 재판소가 맨체스터 시티의 챔피언스 리그 2년 출전 금지 징계를 뒤집었을 때 실망했다.

 

FSG는 팬데믹의 재정적 영향을 완화하기 위해 2021년 3월 뉴욕에 기반을 둔 투자 펀드인 레드버드 캐피탈 파드너스에 전체 비즈니스의 11%를 약 7억 3,500만 달러(당시 5억 3,300만 파운드)에 매각했다. 이를 통해 안필드 로드 스탠드의 8천만 파운드 재개발을 진행할 수 있었다.

 

구단주로 있는 기간 동안 변하지 않은 것은 리버풀의 자생 비즈니스 모델이었다. 수익으로 창출된 모든 것은 구단으로 다시 돌아간다.

 

지난 12년 동안 FSG는 총 약 11억 1,400만 파운드의 이적 거래를 승인했다. 그러나 같은 기간 동안 리버풀은 매각에서 약 7억 9천만 파운드를 회수했다. 이는 총 넷스펜딩이 3억 2,400만 파운드, 연간 2,700만 파운드이다.

 

장부의 균형을 효과적으로 유지하면서 우승을 가져온 것은 클롭의 업적을 더욱 놀랍게 만든다. FSG의 기간 동안 리버풀의 넷스펜딩이 4,500만 파운드를 초과한 것은 단 한 번뿐이다.

 

2018-19시즌에 케이타, 파비뉴, 제르단 샤키리, 알리송을 약 1억 8천만 파운드에 영입했다. 당시 넷스펜딩은 1억 3,450만 파운드였지만, 바르셀로나로 이적한 필리페 쿠티뉴의 이적료 중 상당 부분이 즉시 재투자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전 시즌 이적료로 6,150만 파운드의 이익을 가져왔다.

 

물론 넷스펜딩은 모든 것을 말해주지 않는다. 리버풀의 임금 체계는 FSG 하에서 연간 3억 파운드 이상으로 치솟았고, 버질 반 다이크와 모하메드 살라와 같은 엘리트 선수를 잔류시키는 것을 우선시하고 있다.

 

전 스포츠 디렉터 마이클 에드워즈의 성공의 열쇠는 비주류 선수를 판매하여 상당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리안 브루스터(2,350만 파운드), 키야나 후버(1,350만 파운드), 대니 워드(1,250만 파운드), 도미닉 솔랑케(2,400만 파운드), 조던 아이브(1,500만 파운드)가 그 완벽한 예다.

 

현재 상황을 살펴보면 다음 몇 번의 이적 시장에서 에드워즈의 후임인 줄리안 워드가 어느 정도로 향상시킬 수 있는지 알기가 어렵다. 아마도 퀴빈 켈러허 또는 냇 필립스가 적합할 수 있다.

 

클롭은 상대적으로 작은 스쿼드와 함께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이는 모든 사람에게 헝그리 정신과 동기를 부여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또한 구단 내 가장 재능 있는 어린 선수들이 1군으로 가는 길을 막지 않기로 했다.

 

이러한 기조는 변하지 않을 것이지만 금요일 AXA 트레이닝 센터에서 대화가 새로운 투자에 대한 구단주 탐색으로 바뀌었을 때 클롭은 "검증된 자원"을 영입해야 할 때가 어떻게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것은 저렴하지 않다.

 

클롭이 3천만 파운드에서 4천만 파운드를 지출할 수 있는 일반적인 시나리오와 판매로 창출할 수 있는 모든 금액은 지금부터 다음 시즌이 시작될 때까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볼 때 삭감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가진 구조에서 우리는 분명히 돈을 쓸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가 벌어들이는 것을 봐야했습니다. 그 상황은 분명했죠."라고 클롭은 말했다.

 

"우리 모두는 올해 다윈 (누녜즈) 이전에 영입한 과거의 가장 큰 두 번의 이적이 알리(알리송)와 버질 (반 다이크)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런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르셀로나에서 (쿠티뉴의 이적으로) 돈을 받았고 현명하게 썼고요."

 

"우리가 지금까지 해낸 것이 우리를 지금의 위치로 이끌었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자금은 실수가 아닙니다. 이렇게 말하고 싶네요. 더 저렴해지는 것은 없습니다. 때로는 지출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어린 선수들에게 기회를 주게되어 정말 기쁩니다. 그 선수들이 미래에 미칠 영향에 대해 매우 긍정적이고요. 그러나 때때로 검증된 자원이 필요합니다. 이상적인 세계에서, 그런 선수들은 젊거나 35살이 아니죠! 때때로 약간의 위험은 감수해야 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겠지만 긍정적입니다. 긍정적이지 않으면 걱정하기 시작하겠죠.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단기적으로는 어떨까? 겨울 이적 시장이 7주 밖에 남지 않았다.

 

"많은 논의가 있지만 겨울에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지, 예, 아니오, 이런 종류의 것들에 대해서는 결정된 것이 없습니다." 클롭이 덧붙였다.

 

"우리는 그 전에 시간이 있지만 항상 시장을 따라갑니다. 그것은 계속될 것이죠. 나머지는 우리가 관여하지 않으며 괜찮습니다. 우리는 축구에 집중해야 하고 그것이 우리가 하는 일입니다."

 

리버풀의 CEO인 빌리 호건은 FSG 회장 마이크 고든이 잠재적인 매각에 집중하기 위해 한 걸음 물러서면서 구단의 일상적인 운영에 더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러나 FSG 고위 소식통은 "평소와 같은 비즈니스"이며 접근 방식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인수가 임박했을 때 구단주는 이적 시장에서 더 보수적이 될 수 있지만, 구단과 투자자 모두에게 데이터 중심의 축구 컨설팅을 제공하는 MRKT Insights의 공동 설립자인 팀 키치는 FSG가 허리끈을 졸라맬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이 과정은 1년 또는 그 이상이 걸릴 수 있습니다."라고 키치는 말한다. "그 기간 동안 FSG가 스쿼드에 돈을 쓰는 것을 멈출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FSG의 본질은 침착하고 합리적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들이 수익을 다시 투자하는 측면에서 해왔던 일을 계속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잠재적인 구단주라면 선수단과 향후 몇 년 동안 해야 할 일에 대해 스스로 조언을 받을 것이고, 그에 따라 구단에 대한 평가를 내릴 것입니다. 물려받을 것은 무엇일까요?

 

"지금 선수 구매를 중단한다면 미래 투자자들에게 긍정적이지 않으며, 특히 챔피언스리그 출전이 최대 1억 파운드의 가치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더욱 그렇습니다. 마찬가지로, 많은 것을 기여하지 못할 선수에게 많은 돈을 쓴다면 부정적인 것입니다.

 

"리버풀 스쿼드에는 최근 몇 년 동안 영입을 위해 많은 가치를 창출했기 때문에 귀중한 자산이 많이 있습니다."

 

리버풀의 연간 총 수익은 내년 초에 다음 장부가 발표될 때 처음으로 6억 파운드를 초과 할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안필드 로드 스탠드는 내년 8월에 문을 열 예정이며 7,000석을 추가해 수용 인원을 약 61,000명으로 늘리고 매치데이 수입을 강화할 예정이다.

 

 

 

상업적으로는 연간 약 5천만 파운드 상당의 새로운 4년 스탠다드 차타드 유니폼 후원 계약이 내년 여름에 시작된다. 2022년 동안 리버풀은 비스타, EA 스포츠, 와사비, 니베아 맨, 코카콜라, 익스트림 네트워크와도 수익성 있는 계약을 체결했다. 새로운 셔츠 소매 스폰서 계약에 대한 논의가 진행 중이며 익스피디아와의 계약이 시즌이 끝날 때까지다.

 

"리버풀은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기 때문에 모든 구매자가 프리미엄을 지불할 정도로 꾸준한 수익원을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영국, 포르투갈 및 이탈리아의 구단을 인수하는 그룹과 함께 일한 키치는 덧붙인다.

 

"우리는 축구의 왕관 보석 중 하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며 자주 구매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맨체스터 시티는 뉴캐슬과 약간 비슷한 프로젝트 인수였습니다. 프리미어리그 구단을 인수해 빅 클럽으로 바꾸려고 한 인수죠. 리버풀은 이미 프로필과 도달 범위 측면에서 세계 5위 안에 들었습니다.

 

"30억 파운드에서 40억 파운드를 지출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이를 충족한다면 팬 그룹이 누구를 받아들일 것인지에 대한 잠재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관심이 있을 것입니다. 그 관심은 하나의 고액 순자산 개인이 아니라 투자자 그룹 또는 FSG와 같은 다른 펀드에서 비롯될 것이라 예상됩니다.

 

"우리는 축구에 투자하려는 미국인들이 많아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리즈 유나이티드와 같이 누군가가 인수한 다음 향후 몇 년 동안 다양한 가격대에서 지분을 점진적으로 늘리는 상황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FSG의 초기 투자 금액인 3억 파운드의 10배 이상의 가치가 있는 자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작은 지분을 판매하기로 결정한다 해도, 여전히 처음에 투자한 것보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죠.

 

"FSG는 2010년 매각을 둘러싼 상황 때문에 구단을 아주 좋은 가격에 인수했습니다. FSG는 떠나는 날 큰 수익을 얻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돈을 꺼낸 적이 없죠. 지난 12년 동안 구단을 현명하게 운영한 결과 30억 파운드의 이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클롭은 여름에 이적과 관련하여 "더 많은 위험"을 감수하고 싶을 때가 있다고 인정했다. 새로운 투자는 그에게 그 사치를 줄 것이다. 그것이 FSG가 소수 지분을 매각하는 형태인지 아니면 완전한 인수의 형태인지는 시간만이 말해줄 것이다.

 

그러나 중원 개편이 시급하기 때문에 더 빨리 일어날수록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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