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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rieving Antonio Conte. ‘Work is not everything in life.’ Neither is football. - The Athletic

누군가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보다 더 개인적인 것은 생각하기 어렵다.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에 매우 다른 방식으로 대처하고 반응한다. 어떤 사람들은 우울증에 시달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나중에 슬픔이 찾아오고, 어떤 사람들은 슬픔이 강렬하게 다가올 수 있다. 하지만 공식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고, 슬픔을 사라지게 하는 마법의 지팡이도 없고... 있어서도 안된다. 슬픔의 과정도 위안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슬퍼하는 법을 말할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축구 경기와 같은 유치한 것들에 대한 비교적 부질없는 논쟁 속에서, 우리는 안토니오 콘테가 지난 3개월 동안 경험했던 것을 기억해야 한다.
 
축구가 도피처가 될 수 있고 (우리 모두는 코로나 기간 동안 이를 경험했다) 일은 머리를 식히게 해줄 수 있다. 그러나 슬픔은 결코 진정으로 떠나지 않는다.
 
10월, 콘테는 좋은 친구이자 피트니스 코치인 61세 지안 피에로 벤트로네를 급성 백혈병으로 잃었다. 벤트로네의 사망은 구단과 선수들, 그리고 콘테와 스태프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콘테는 유벤투스에서 선수로 벤트로네 밑에서 훈련했고, 2005년 감독 커리어를 시작할 때 그와 함께 일하기 시작했다. 해병으로 알려진 벤트로네는 토트넘 훈련장에서 매우 인기 있는 인물이었다.
 


그 후 12월, 세리에 A에서 함께 뛰었으며 친구인 시니사 미하일로비치도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미하일로비치는 53세였고, 지금 콘테와 같은 나이였다.
 
미하일로비치는 1월에 런던을 방문해 콘테를 만나고 훈련을 관람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콘테는 SNS에 미하일로비치에 대한 추모글을 올렸다.
 


그리고 이달 초, 오랜 팀 동료이자 절친한 친구 지안루카 비알리가 58세의 나이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 두 선수는 유벤투스와 이탈리아에서 수년간 함께하며 챔피언스 리그, UEFA 컵, 세리에 A 우승을 차지하면서 놀라운 성공을 거뒀다.
 
콘테는 두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을 올리며 "경기장에서 우리의 모든 모험과 전투를 기억하는 것이 즐거웠고, 몇 달 전 런던에서 함께 저녁 식사를 하기도 했다."라고 말했다.
 
"불행히도 지난 몇 년 동안 넌 인생에서 크고 끔찍한 전투를 치러야 했다. 나는 너에게 항상 주장으로서 나에게 영감을 주었고, 너가 이 병에 맞서 사자처럼 싸우는 방식이 얼마나 강하고, 자랑스럽고, 용감한지에 대해 말했다. 내 마음속에는 언제나 내 친구일 것이다."
 


10월 벤트로네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랬던 것처럼, 비알리가 세상을 떠난 후 콘테는 기자회견에 나오지 않았다.
 
콘테는 맨체스터 시티와의 경기를 앞두고 가진 기자회견에서 이런 비극 속에서 어떻게 대처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평범한 삶과 축구를 이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엿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번 시즌은 개인적으로 어려운 시즌입니다. 이렇게 짧은 시간에 제가 아주 잘 아는 세 사람인 벤트로네, 미하일로비치, 비알리를 잃게 됐죠. 쉽지 않았습니다."
 
"확실히 이런 일이 일어날 때 중요한 성찰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많은 시간을 생각하고, 일에 많은 중요성을 부여하고, 가족을 잊어 버리고, 자신을 위해 더 많은 시간을 가진 필요가 있다는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죠. 이번 시즌은 제게 어려운 시즌이고, 제 미래에 대한 중요한 성찰을 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제 자신을 돌보기 위해서, 하지만 일을 하고 있고 일이 제 우선 순위라면, 아마도 우리는 가족과 함께 있는 것을, 친구들과 함께 있는 것을,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을 겁니다. 하지만 이것이 열정이고 이 열정 때문에 우리는 많은 것을 잃게 되는 것이죠. 이런 (친구를 잃는) 일이 발생하면 때로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더 많은 시간을 주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에게도 말이죠."
 
콘테의 아내와 딸이 이탈리아에 있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그것도 쉽지 않다.
 
"우리 가족이 이탈리아에 있는 것은 확실히 좋지 않습니다. 아이가 학교에 다니고 있으니까 존중은 해야죠. 저는 여기에서 2시즌을 보냈고, 환경을 완전히 바꾸려면 아이들이 여기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저는 (가족을 여기에 데려오면서까지) 제 가족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싶지 않아요."
 
"때로는 결정을 내리고 희생하고 머무르는 게 중요할 때도 있습니다. 저는 저를 응원하고 할 수 있는 모든 순간에 여기에 와주는 가족이 있습니다. 이런 상황은 (가족이 없을 때) 더 어려워지죠."
 
콘테가 개인적인 고통의 기간 동안 집중력을 잃었다고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콘테는 고집스럽고 가차없는 집중력과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 쓴다는 평가를 받는 사람이지만, 화요일에 자신이 말했듯이 슬픔은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되돌아보게 할 수 있다. 그건 나쁜 일이 아니다.
 
그는 지난 석 달 동안 겪은 일 때문에 구단에 대한 헌신에 대한 비판이 더 아프지 않느냐는 질문에 콘테는 "어떤 팀도 (제 헌신에 대해) 불만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보통 제가 구단을 떠날 때, 그들은 제가 일하는 방식과 헌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것을 후회하죠. 지금 이대로가 정말 행복합니다."라고 답했다.
 
콘테는 개인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다. 기자회견은 대개 엄격하게 통제되며 신중하고 정확하게 단어를 선택한다. 콘테가 그 문을 조금만 열어도 자신이 경험한 트라우마에 대한 작은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 현실은 훨씬 더 화가 났겠지만, 그건 콘테의 사생활과 슬픔이지 우리의 슬픔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팬들과 언론인들 모두, 사람을 조금 느슨하게 만드는 것이다.
 
"일이 인생의 전부는 아닙니다."라고 콘테가 화요일에 말했다.
 
축구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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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날은 이제 프리미어리그 우승 후보라고 불려야 마땅하다. 그들이 PL 정상권에 위치하면서 판도를 바꾸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미켈 아르테타에 대해 우리가 가질 의구심은 '시즌 후반기에도 리그 선두 자리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냐?' 이다. 하지만 아스날의 선수들이 타이틀 경쟁을 경험해 본 적 없다는 걱정은 그리 크게 하지 않아도 될 듯 하다.

 

 

월요일, 그들은 북런던 라이벌 토트넘을 상대로 뛰어난 승리를 거두면서 자신들이 왜 PL 정상에 위치하고 있는지 증명했다.

 

 

전반전에 우리는 그들의 공격 방식과 그들의 창의성을 보았고, 토트넘을 계속 압박하여 반코트를 유지, 계속 그들의 실수를 유발했다.

 

 

아스날은 후반전에 여러 많은 수비를 보여줬다. 공을 소유하지 못한 상황에서도 그들의 능력을 보여줬다. 토트넘이 그들의 수비를 뚫었을 때? 아론 램스데일이 훌륭한 선방을 보여주며 실점으르 막았다.

 

 

나는 아스날이라는 팀 전체에 대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엄청나게 깊은 인상을 받았다.

 

 

-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된 것처럼 보이는 아르테타

 

 

 

18경기를 치룬 상태에서 2등보다 승점 8점채로 앞서 있는 것은 아스날이 엄청난 성과를 거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런 리드를 즐길 자격이 있다.

 

 

이제 아스날은 현재 위치해 있는 자리에 계속 머물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많은 아스날의 선수들은 리그 상황이 얼마나 빠르게 변할 수 있는지 이미 한번 느꼈었다. 저번 시즌, 토트넘에게 밀려 4위 싸움에서 패배하고 UCL 진출에 실패했을 때 말이다.

 

 

하지만 이번 시즌이 시작된 이후 나는 그들이 멘탈적인 측면에서 아스날이 완전 다른 팀처럼 바뀌었다고 말했었다. 

 

 

아르테타는 훌륭한 경기 태도를 가지고 재능이 가진 선수들로 선수단을 구성했고 그들은 감독이 원하는 것을 매우 편안하게 수행하고 있다.

 

 

승리에 대한 선수들의 의지뿐만 아니라, 그들은 모든 포지션에서 다른 팀 선수들에 비해 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월드컵 이후로 가브리엘 제주스가 부상을 당했지만 이에 대해 잘 대처를 하고 있다.

 

 

전술적으로 봤을 때도 아르테타는 어떤 경우의 수더라도 모든 준비가 되어 있는 감독처럼 보인다. 그들은 북런던더비 전술로 상대팀 감독인 안토니오 콘테를 압도했고, 특히 전반전의 아스날은 경기장의 모든 구역에서 특별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물론 여전히 넘어야 할 큰 장애물이 있다. 그들은 맨시티와의 리그 2경기가 남아 있다. 그리고, 다음 주 월요일에는 다시 부활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상대한다.

 

 

그러나 저 게임을 제외한 모든 게임은 다 중요한 게임이며 그들은 누구를 상대로 만나든 정말 강한 모습을 보여줄 것 같다. 그들은 엄청난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고 당장 그들에게 브레이크를 걸 수 있기는 어려워 보인다.

 

 

- 과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타이틀 경쟁에 참여할 수 있을까?

 

 

이번 주말은 아스날에게 있어 아주 좋은 시간이었다. 토요일, 맨체스터 더비에서 우승 경쟁팀 시티가 발목을 잡혔기 때문이다.

 

 

작년 리그 디펜딩 챔피언은 불행하게도 이상한 동점골을 당했다. 나는 그 브루노 페르난데스의 골은 오프사이드로 선언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골은 경기의 판도를 완전히 뒤집어 놨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맨시티가 타이틀 경쟁을 이어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오직 맨시티만이 아스날과 타이틀을 경쟁할 수 있는 팀은 아니다.

 

 

나는 사람들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대해서 시즌 초반의 의견을 재평가하는 이유를 이해한다. 왜냐면 그들은 현재 엄청난 결과를 내고 있고, 에릭 텐 하흐는 짧은 시간 안에 맨유와 함께 놀라운 발전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맨유는 다음 주 월요일, 에미레이츠 스타디움으로 날아가 아스날을 상대한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당신은 PL 우승 경쟁팀들에서 맨유를 배제할 수 없다. 맨유가 이긴다? 그들이 타이틀 경쟁팀으로 완전히 올라서게 될 것이다. 하지만 맨유가 지고 아스날이 이긴다? 맨유의 이번 시즌 타이틀 경쟁은 완전히 끝났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뉴캐슬 유나이티드도 맨시티와 1점 차이로 뒤져있는 상황이다. 한경기 더 치루었긴 하지만.

 

 

하지만 나는 뉴캐슬을 타이틀 경쟁자로 간주할 생각은 없다. 나는 뉴캐슬이 현재 탑4에 위치해 있는 게 '기적' 이라고 생각한다.

 

 

일요일 토트넘의 패배는 아스날뿐만이 아니라 뉴캐슬의 에디 하우 감독에게도 희소식이었다. 토트넘도 뉴캐슬과 챔피언스리고 티켓 경쟁을 벌이고 있는, 뉴캐슬에게 위협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이 리그 막판 아스날의 챔피언스리그행을 저지시키고 본인들이 챔피언스리그 티켓을 딴 것을 본 적이 있다.

 

 

나는 또, 첼시도 몇몇 선수들이 부상에서 복귀하면 다시 순위가 상승될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리버풀은 리그 타이틀 경쟁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리버풀의 상황은 곧 나아질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그들에게는 길고, 힘든 시즌이 될 것이다.

 

 

- 나는 뉴캐슬의 챔스 진출보단 컵을 드는 것을 선호한다.

 

 

지금, 뉴캐슬의 팬들은 다른 시즌과는 매우 다른 시간을 보내고 있으며, 나 또한 지금 이 순간을 매우 즐기고 있다.

 

 

하우는 훌륭한 성적을 거두고 있으며 이번 주말의 풀럼과의 경기도 아쉬운 경기력이지만 어쨌든 승리를 거두었다.

 

 

뉴캐슬은 저번 풀럼과의 경기에서 좋은 경기를 펼치지 못하였고 알렉산다르 미트로비치가 PK를 실축하면서 약간의 운으로 승점 3점을 획득하였다. 하지만 일단 우리는 가장 필요한 승점 3점을 얻었다. 경기력은 그리 중요치 않다.

 

 

UCL 진출도 나에게 있어 정말 환상적인 순간이지만 나에게 있어 가장 의미있는 것은 우승컵을 드는 것이다.

 

 

이번 시즌, 나의 꿈은 (뉴캐슬이) 트로피를 드는 것이다. 나는 뉴캐슬이 4위 안에 들어서 시즌을 마무리하는 것보단 뉴캐슬이 카라바오 컵 트로피를 드는 것을 훨씬 더 선호한다.

 

 

당연히 나도 두 가지 다 이루는 걸 보고 싶다. 하지만 선택권을 주며 더 원하는 것을 하나만 고르라고 하면 나는 카라바오컵 우승을 고를 것이다. 그것이 나에겐 훨씬 더 중요하다.

 

 

뉴캐슬이 가장 최근에 든 트로피는 1969년, 유로파리그의 전신인 인터-시티 페어스 컵을 든 것이다.

 

 

이건 내가 태어나기 전이라 나는 우리가 트로피를 드는 걸 직접 보고 싶다. 나는 그걸 너무 기다리고 있다. 빨리 우리가 트로피를 들길 바란다.

 

 

 

- 이 모든 내용은 앨런 시어러가 BBC, 크리스 베반과의 이야기에서 말한 것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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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washingtonpost.com/made-by-history/2022/12/08/why-doesnt-argentina-have-more-black-players-world-cup/

 

Perspective | Why doesn’t Argentina have more Black players in the World Cup?

Argentina is far more diverse than many people realize — but the myth that it is a White nation has persisted.

www.washingtonpost.com

 

이번 2022 월드컵에서의 아르헨티나의 성공을 바라보며, 한 가지 질문이 여러 팬들 사이에서 흔히 나타났다. 왜 아르헨티나 국가대표팀은 많은 흑인 선수들을 보유하고 있지 않은가? 아르헨티나의 축구 국가대표팀은 브라질 같은 다른 남아메리카 국가들과는 극명히 대조적으로, 흑인 대표 선수들의 비율이 현저히 떨어진다.

 

 

이런 분석은 새로운 것은 아니다. 2014년, 분석가들은 월드컵 결승전에서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에 적어도 한 명 이상의 흑인 선수가 있던 반면 아르헨티나는 한 명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는 농담을 던졌다. 2010년 아르헨티나 정부의 인구 조사 통계에서는 흑인의 수가 국가의 1%에도 훨 못 미치는 149,493명으로 나타났다. 아르헨티나가 정말로 백인 국가임을 확인시켜준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거의 20만 명의 아프리카 노예들이 아르헨티나가 식민지였던 기간 동안 라 플라타 강 기슭에 상륙했었고, 18세기 말엽에는 인구의 3분의 1 가량이 흑인이었다. 이는 아르헨티나를 백인 국가로 생각하는 것은 부정확할 뿐 아니라, 아르헨티나의 자기 정체화 의 중심에 있는 “흑인 말살”의 긴 역사가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아르헨티나인들에게는 흑인 아르헨티나인들의 부재를 “설명”해주는 것으로 알려진 신화가 있다. 이 중 아마도 첫 번째이자 가장 유명한 신화는 흑인들이 19세기 내내 있었던 전쟁에서 “총알받이”로 사용되어 어마어마한 사망자를 내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아르헨티나 독립 전쟁(1810~1819) 동안, 노예들은 스페인 군대에 맞서기 위해 5년의 복무 이후 자유를 주겠다는 약속과 함께 징병되었다.

 

 

그러나 역사학자 조지 리드 앤드류스가 주장한 대로, 많은 이들이 전장에서 죽기보다는 그냥 버려지거나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을 선택했다. 1829년의 점호에서는 아프리카계 아르헨티나인 제4척후병부대에서 31명의 전사자와 802명의 탈영자가 발생햇음을 보여준다. 이들 중 일부는 훨씬 북쪽의 페루 리마로 재배치되었다. 일부가 죽거나 탈영한 동안, 다른 이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아르헨티나의 가장 유명한 도시인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인구조사 통계에서는, 1778년에서 1836년까지 아프리카 혈통의 인구는 두 배 이상 증가한 것이 드러났다.

 

 

다른 신화로는 19세기 전쟁이 야기한 흑인 남성의 높은 사망률로 인해 아르헨티나의 흑인 여성들이 유럽계 남성들과 가정을 꾸릴 수 밖에 없었고, 이로 인해 흑인의 “실종”이 일어났다는 것이 있다. 몇 세대 이상 걸친 인종 간 혼합이 신체적으로 더 밝고 하얀 피부의 인구들을 만들면서 피해를 준 것으로 생각된다. 이 이야기에서 흑인 여성들은 그들의 삶의 모든 면에 명령받은 강압적인 체제의 일부 피해자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더 최근의 연구들은 일부 아르헨티나의 흑인 여성들이 그들 스스로나 자식들을 위해 백인들에게 제공되는 혜택들을 얻기 위해 백인이나 아메리카 원주민으로 통하는 결정을 결연히 내렸다는 것을 밝혔다. 베르나벨라 안토니아 비야몬테와 같은 몇몇 흑인 여성들은 다양한 법적 정책의 이점을 이용하여 노예로 태어났으나 자유롭게, 그리고 백인 여성으로 인지된 채로 사망했다. 

 

아르헨티나 문화 내 흑인 대표성의 부족에 관한 다른 신화는 질병, 그 중 1871년의 황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일부는 많은 흑인 아르헨티나인들이 그들의 빈곤으로 인해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극심한 감염지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불가능했고 질병에 굴복했다고 주장한다. 이 이론 또한 황열병으로 인한 흑인 사망자 수가 다른 인구에 비해 높은 비율로 나타나지 않아 거짓으로 밝혀졌다.

 

아르헨티나의 흑인 “실종”에 대한 이러한 신화들은 아르헨티나의 가장 오래 지속되는 역사적 유산들 중 일부를 모호하게 했다. 

 

실제로 아르헨티나는 노예와 그들의 후손에서 이민자들까지 여러 세기 동안 수많은 흑인들의 고향이었다. 카보베르데인들 19세기의 포르투갈 여권을 갖고 아르헨티나로 이주하기 시작했고, 1930~40년대에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이 선원과 항만 근로자로의 취업을 위해 아르헨티나로 들어왔다. 

 

그러나 아르헨티나의 전 대통령 도밍고 파우스티노 사르미엔토(1868~1874 재임)와 같은 백인 아르헨티나인들의 리더들은 근대성을 백인성(Whiteness)과 동일시하였기 때문에 흑인(Blackness)성을 지우는 다른 서사를 만들었다. 사르미엔토는 아르헨티나의 “후진성”과 사르미엔토가 여긴 “문명화”의 필요성을 서술하는 <파쿤도: 문명과 야만>(1845년 저)이라는 책을 지었다. 그는 국가의 비전을 아프리카나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유산보다는 유럽의 유산과 더 강하게 공유한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아르헨티나는 1853년 국가의 대부분 지역에서, 그리고 1861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노예제를 폐지했다. 노예제의 역사를 뒤로 한 아르헨티나의 리더들은 유럽을 문명과 진보의 요람으로 보면서 근대화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들은 독일, 프랑스, 영국의 반열에 합류하기 위해선 흑인 인구를 신체적, 문화적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믿었다.

 

여러모로, 이것은 아르헨티만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백인화 과정은 브라질, 우루과이, 쿠바와 같은 라틴 아메리카 도처에서 시도되었다.

 

그러나 이 경우 아르헨티나의 유일한 차이점은, 이들은 백인 국가로써의 이미지 구축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1850년대, “통치하는 것은 인구다”라는 말로 알려진 정치 철학자이자 외교관 후나 바티스타 알베르디는 백인 이민을 장려하였다. 아르헨티나 대통령 후스토 호세 데 우르퀴자(1854~1860 재임)는 알베르디의 아이디어를 지지했고 이를 국가의 첫 헌법에 적용했다. 수정 헌법 25조에서는 “연방정부는 유럽 이민을 촉진해야 한다”고 명시되였다.

 

사실 사르미엔토 대통령은 19세기 말엽 “20년 뒤에는 흑인들을 보기 위해 브라질로 여행해야 할 것이다.”라고 발언했다. 그는 흑인 아르헨티나인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으나 국가는 그들을 오랫동안 인정하지 않을 것임을 시사한 것이다. 아르헨티나의 지형은 곧 변화했다. 1860~1914년 사이 4백만의 유럽 이민자들이 정부의 부름에 답하여 이민을 왔고, 이 조항은 오늘날 아르헨티나의 조항에도 남아 있다.

 

유럽인들의 대량 이민 이전의 아르헨티나의 흑인과 아메리카 원주민 인구에 대해서는, 그들이 더 애매해진 민족, 인종적 범주를 “통과”하거나 머무를 수 있던 많은 사람들이 전략적으로 백인으로 정체화되었다. 

 

이러한 분류는 크리요오(주로 스페인인 혹은 아메리카 원주민 조상과 연관된 이전의 이민자들), 모로초(탄 색의 사람들), 파르도(갈색 피부)와 트리게뇨(위트(밀)색)를 포함했다. 이러한 꼬리표들은 그들을 궁극적으로는 “기타”로 묘사했지만, 그들은 또한 국가가 이를 명령한 시기 그들을 흑인으로부터 분리하는 데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국가에서 흑인성을 지우려는 역사와 그 잔재에도 불구하고, 아르헨티나의 흑인 인구는 남아있으며 더 많은 아프리카계 혈통이 이주해 오고 있다.

 

오늘날, 만이천 명에서 만오천 명의 카보베르데에서 온 이민자들과 이들의 후손들이 부에노스 아이레스 지역에서 살고 있다. 90년대와 2000년대에는 유럽이 이민 장벽을 높이면서 서부 아프리카인들이 아르헨티나로 대거 이민해 오기 시작했다. 인구 통계는 아르헨티나가 2001년에는 1,900명의 아프리카 출생 국적자들을 수용했지만, 2010년에는 거의 두 배를 수용했다. 지난 10년 간, 브라질, 쿠바, 우루과이와 같은 다른 라틴 아메리카에서 온 아프리카계의 후손들 또한 경제적 기회를 찾아 아르헨티나로 들어오는 경우가 증가하였다. 

 

이러한 역사는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이 아마도 아프리카인 후손들 혹은 흑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포함하지 않지만, 또한 “백인 팀” 역시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아르헨티나는 근대적인 백인 국가로 보이려는 시도를 통해 인종적 분류를 붕괴시켰지만, 모로초로 일컬어지는 사람들의 존재는 흑인과 토착민 말살의 역사에 빚을 지고 있다. 모로초(morocho)라는 악의 없는 꼬리표는 오늘날 아르헨티나에서 쓰이고 있다. “탄 피부”의 사람들을 일컫는 이 단어는 백인이 아닌 사람들을 구분하는 방법으로 사용되어 오고 있다.

 

아마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유명한 모로초는 80~90년대 두각을 나타낸 축구의 전설 디에고 마라도나일 것이다. 그가 2020년 11월 세상을 떠났을 때, 아르헨티나는 3일 간의 애도 기간을 가졌다. 이 백인이 아닌 전설은 아이러니하게도 “백인 국가”와 아르헨티나 축구의 상징이 되었다. 

 

오늘날 팀의 다양한 선수들은 아르헨티나에서 모로초로 묘사될 수 있다. 이러한 역사를 이해한다면 흔히 많은 사람들이 관련시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다양한 아르헨티나를 볼 수 있다. 또한 많은 국가 지도자들이 근대 국가로써 여긴 방향인, 흑인성을 말살하고 최소화하려던 혼신의 노력을 지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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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tv2.no/sport/fotball/premier-league/wenger-avslorer-odegaard-samtaler-jeg-var-desperat/15386080/?mode=app&app=sporten

 

TV2와의 주요 인터뷰에서 아르센 벵거(73)은 마틴 외데고르(24)와 계약하려는 시도, 그의 큰 관심사, 그리고 오늘날의 아스날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입을 열었습니다.

 

2018년 아르센 벵거가 아스날 감독직에서 사임한 이후 처음으로 이 프랑스인은 에미레이츠 스타디움으로 돌아와서 박싱데이 경기를 지켜봤습니다.

 

스탠드에서 전설적인 감독은 마틴 외데고르가 이끄는 The Gunners가 완전히 지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벵거가 현 아스날 주장에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였습니다.

 

TV2와의 독점인터뷰에서 벵거는 외데고르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전설적인 감독은 다음을 포함하여 노르웨이 스타에 대해 몇가지 주제에 대해 말했습니다.

 

외데고르 영입 실패

그의 외데고르에 대한 관심

벵거를 매료시킨 외데고르의 디테일

외데고르와 오늘날의 아스날에 대한 생각

 

외데고르 영입 사가- 어려웠다

 

시계를 2014년으로 되돌립니다. 축구계 전체가 마틴 외데고르 신드롬으로 침을 흘리고 있습니다. 그 창의적인 선수는 아스날을 포함한 유명 클럽들의 관심을 받고 있었습니다.

 

벵거는 여러 차례 외데고르가 아스날을 선택하도록 설득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저녁식사 자리를 가졌고 벵거는 그의 계획을 설명했었습니다.

 

하지만 15세의 마틴은 레알 마드리드를 선택했습니다.

 

"힘들었습니다. 그가 15살이였을때 저는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박싱데이가 끝나고 실제로 마틴하고 이야기를 나누었죠"


"그와 계약하고 싶었습니다. 다행히 지금 아스날에 있네요. 그는 정말 젊은 세스크 파브레가스 같습니다. 완성도 높은 선수로 성장했다고 생각합니다."

 

외데고르와 다시 만났을 때 어떤 이야기를 나눴나요?

 

"음, 그는 게임 분석을 잘하는 차분한 선수였어요. 자신의 주관이 있습니다. 마틴과 이야기한 내용을 상세하게 말하고 싶진 않습니ㅏ다"

 

외데고르에 대한 인상은?

 

"저는 매우 감명받았습니다. 그는 정말 현실적이고 좋은 소년입니다. 그가 게임을 분석하는 방식. 15살때도 그랬는데. 그 날카로움! 정말 감명 받았습니다. 그는 잘할 것입니다."

 

 



-저는 마틴을 걱정했었습니다.

 

그러나 그 프랑스 인은 외데고르가 가장 큰 무대에서 성공할 지 항상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외데고르는 레알 마드리드에서 많은 신뢰를 받지 못했습니다. 성장이 중단되었다고 벵거는 말합니다.

 

"저는 마틴을 걱정했었습니다. 저는 그가 그의 창의성을 약간 잃었다고 생각합니다. 창의력이 정체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외데고르는 벵거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아스날에 온 후, 그는 자신의 창의성을 되찾았습니다. 그는 놀랍도록 잘 플레이하고 게임의 모든 것을 마스터합니다. 그는 완전합니다. 저는 게임의 모든 면에서 그를 좋아합니다. 수비와 공격에서 모두"

 



벵거를 매료시킨 외데고르의 디테일

 

벵거의 팀은 결국 많은 기술적 기교와 많은 움직임으로 특히 아름다운 축구를 하는 것으로 유명해졌습니다.

 

벵거가 외데고르의 플레이스타일을 좋아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하나를 벵거는 높이 평가합니다.

 

"그는 신속하고 항상 최적의 결정을 내립니다. 놀랍습니다! 저는 그를 좋아하고 그가 축구를 쉽게 하는 방식을 좋아합니다."

 

"그는 매우 잘 발전했습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그는 또한 팀의 리더입니다. 노르웨이는 이제 더 많은 일류 선수를 확보하고 있으며 앞으로 몇 년 동안 그들이 국제무대에서 잘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스날에 대해 벵거- 끝까지 갈 수 있다

 

벵거는 또한 박싱데이에 웨스트햄과의 3대1 승리에서 외데고르와 그의 전 클럽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 프랑스인은 22시즌 동안 아스날을 3번의 프리미어리그 우승으로 이끌었습니다. 이제 그는 리그 타이틀을 다시 한 번 북런던으로 가져올 수 있다고 믿습니다.

 

"환상적인 플레이였습니다. 아스날은 점점 더 강해지고 있습니다. 일방적인 경기였습니다."

 

"전술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필요한 모든 요소를 갖추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끝까지 갈 수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그들은 많은 기회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저는 약점이 보이지 않습니다."



"사임 이후 에미레이츠에서 아스날을 처음 봤는데 어떤 기분이였나요?"

"훌륭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에 대해 많이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외데고르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다시 전화하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를 매우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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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과 축구계의 영원한 레전드 펠레는 2021년 9월에 진단 받은 대장암 합병증으로 투병끝에 오늘 세상을 떠났습니다.

 

3번의 월드컵 우승을 경험한 그는 놀라운 커리어에도 불구하고 축구 인생동안 두곳의 클럽에서밖에 뛰지 않았습니다.-산토스,뉴욕 코스모스

 

많은 이들의 목표가 유럽 축구의 정점에 가서 트로피를 들어올리며 발롱도르를 수상하는것이라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펠레는 왜 대서양 반대편으로 넘어가지 않았을까요?

 

사실 1958년,1962년 월드컵 직후에 펠레를 영입하려는 구단은 꽤 있었습니다.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발렌시아의 이름도 여기에 포함되지만 가장 유명한 사례는 바로 레알 마드리드일것입니다.

 

 

1.펠레의 레알 마드리드 이적설

 

'제가 레알 마드리드와 계약하는것에 있어 근접했던때가 꽤 많았었죠 이후에는 이탈리아의 나폴리와도 계약 기회가 몇번 있었습니다.'

 

'하지만 후회되지는 않아요 저는 산토스에 있었고 당시에 산토스는 강팀이었습니다.'

 

'저는 산토스에서 매우 매우 행복했기에 브라질을 벗어나서 경기를 하지 않았습니다.저는 그곳에서 인생에 있어 15년~20년 동안 머물렀었죠 제게는 레알 마드리드 말고도 다른 제안들이 많이 제의되었지만 제가 있던곳은 괜찮았습니다.'

 




 

2.펠레의 유벤투스,인터 밀란 이적설

 

펠레는 2018년 당시 유벤투스로 이적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에게 축하 인사를 보내면서 과거 유벤투스에 뛸뻔했었다고 말한적 있습니다.

 

'너의 유벤투스에서의 첫경기에 대해서 행운을 빌어,크리스티아누 상황이 달라졌더라면 나도 어쩌면 올드 레이디(유벤투스 별칭)에서 뛰었을지도 몰라'

 

"1961년 어느 저녁에 피아트의 회장(유벤투스 구단주)이 산토스 회장에게 수백만 달러를 건넸었습니다.저를 영입하기 위해서였죠! 하지만 저는 오직 산토스의 이 줄무늬 유니폼을 위해서만 뛰었습니다.!"

 

1958년 당시에는 산토스가 펠레를 인터 밀란으로 이적 시키는것에 대해 합의했었지만 이런 소식이 퍼지자 산토스팬들은 격렬히 반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전 인터 밀란의 회장 마시모 모라티는 당시에 인터 밀란의 회장이자 아버지였던 안젤로 모라티가 펠레의 영입을 철회했던 이유에 대해서 밝혔습니다.

 

'그들과 전화를 했지만 지구 반대편에서는 한 사람의 목숨과 관련된 깊은 염려가 존재했었습니다.'

 

'계약이 순차적으로 진행되었고 체결되었죠 등록만 하면 끝나는 문제였습니다.하지만 이런 소식이 브라질에 당도하자 그곳의 사람들은 그들의 보드진을 공격하기 시작했어요'

 

'이런 상황에서 무엇을 할수 있을까요? 산토스의 회장을 물리적으로 공격하고자 하는 사람을 발견하게 되었을때 그것은 더 이상 축구가 아니라 계약을 파기한 저희 아버지의 양심적인 행동과 관련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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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telegraph.co.uk/football/2022/12/27/arsene-wenger-statue-arsenal-ready-build-tribute-former-manager/

제레미 윌슨 2022/12/27

 

아스날은 박싱데이에 열린 홈 경기에 아르센 벵거가 스타디움으로 돌아 온 후 가능하면 내년 초 에미레이츠 스타디움 외부에 아르센 벵거의 동상을 세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아스날은 벵거가 허버트 채프먼 전 감독, 티에리 앙리, 토니 아담스, 데니스 베르캄프를 이어 구단의 전설적인 영원한 존재가 되기를 원했지만, 벵거는 이번주 전 까지 경기장에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벵거는 2018년 5월 아스날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고 인정했는데, 당시 새 감독이 자리를 잡는 동안 클럽에 남아있지 않는 것이 모든 측면에서 더 좋을 것이라는 의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나이 에메리 시절에는 그 과정이 완료되지 않았지만, 벵거의 전 주장 중 한 명인 미켈 아르테타는 이제 새로운 세대의 젊은 선수들과 함께 프리미어리그 정상으로 도달하였습니다.

 

아르테타와 함께 아스날의 전 부회장인 데이비드 데인은 최근 몇 달 동안 벵거의 에미레이츠 복귀를 독려해왔으며 월요일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와의 경기에서 벵거는 아스날 팬들로부터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습니다.

 

벵거의 전 부인인 애니 브로스터하우스는 특히 임기 말년 동안 벵거가 아스날 감독직을 계속 수행해야 하는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헀던 아스날 팬들의 반응에 감동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구단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들 사이에서 벵거의 지위에는 논쟁의 여지가 없었고, 그가 복귀하기를 원하는 팬들의 압도적인 열망은 최근 아스날 서포터스 트러스트 회의에서 벵거를 아스날로 데려왔던 절친한 친구 데인에게 전달되었습니다.

 

데인은 벵거가 22년간 감독을 맡으면서 프리미어리그 3회 우승, FA컵 7회 우승, 20시즌 연속 4위를 기록하였지만 2018년 아스날과 그의 이별에서 상처를 입었다고 말했습니다.

 

벵거는 월요일 승리 후 드레싱 룸에 방문하여 선수들과 사진을 찍었고 아르테타는 앞으로도 벵거를 더 많이 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2018년 벵거의 사임 이후 벵거의 03/04 인빈시블 팀의 미드필더인 에두 가스파르가 스포르팅 디렉터로 있는 등 중요한 직위에 있던 사람들이 교체되었습니다.

 

벵거의 복귀에 대해 아르테타는 "저는 이 과정에 참여했지만 그가 필요한 타이밍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여기에 남아 기꺼이 우리와 더 많은 시간을 보냈으면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개인적으로 제 커리어와 경기를 접근하는 방식 뿐만 아니라, 이 클럽에도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벵거는 현재 피파의 글로벌 개발 책임자이지만, 감독으로 1235경기를 치룬 후 아스날은 "life and death"가 되었고 "아직도 나의 일부"라고 말했습니다. 벵거는 아스날을 떠난 후 프리미어리그에서 두 번의 감독 제안을 받았지만 아스날과 경쟁하는 것을 상상도 할 수 없었기에 모두 거절하였습니다. 또한 벵거는 아스날에 있는 동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바르셀로나, 레알 마드리드, 그리고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의 제의도 거절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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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8k 금으로 만들어졌다.

 

FIFA 월드컵 트로피는 높이 36cm, 총 무게 6.175kg이며, 18캐럿 금 5kg으로 제작됐다. 초록색 부분은 공작석으로 만들어졌다.

 

2. 트로피는 두 사람이 지구를 들어 올린 모습을 나타낸다.

 

월드컵 트로피는 두 명의 축구 선수가 승리의 순간을 만끽하며, 지구를 들어 올리고 있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월드컵이 전 세계인이 즐기는 최대의 스포츠 축제임을 트로피를 통해 느낄 수 있다.

 

3. 트로피 하단에 우승국 이름이 적혀있다.

 

매 대회마다 우승국 이름과 해당 연도의 숫자가 트로피 하단에 있는 17개 명판에 그 나라의 언어로 새겨진다. 이를테면 ‘2006 Italia’, ‘2014 Deutschland’ 식이다. 1974년부터 현재까지 총 11개의 우승국 이름이 새겨져 있으며, 2018 FIFA 러시아 월드컵을 기점으로 12번째 우승국이 새겨질 예정이다. 2038년에 명판이 모두 차게 되는데, 그 이후 새로운 트로피가 탄생할 가능성도 있다.

 


(▲ 줄리메컵(Jules Rimet Trophy) ©FIFA Museum)

 

4. 지금의 트로피가 최초의 트로피는 아니다.

 

첫 번째 월드컵 트로피는 프랑스 조각가 아벨 라플뢰르(Abel LaFleur)가 디자인한 것으로, 승리의 여신이 8각형의 성찬배를 손으로 받치고 있는 모양으로 만들어졌다. 월드컵 대회의 창시자이자 당시 FIFA 회장이었던 줄리메(Jules Rimet)의 업적을 기려 ‘줄리메컵(Jules Rimet Trophy)’이라 불린다. (지금의 트로피의 공식명칭은 FIFA 월드컵이다.)

 

5. 3번 우승하면 트로피를 영원히 소유할 수 있었다.

 

줄리메컵은 한 국가가 월드컵에서 3번 우승하면 영원히 소유할 수 있다는 규정이 있었다. 1970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브라질이 사상 처음으로 3번 우승하면서 줄리메컵을 영원히 소유하게 됐다. (지금의 FIFA 월드컵 트로피는 소유할 수 없다.)

 

6. 현재 트로피는 1974년 처음 공개됐다.

 

브라질이 줄리메컵을 소유하게 되면서, 이를 대체할 새로운 트로피가 필요해졌다. 멕시코 월드컵이 끝나고 FIFA는 1974년에 열릴 제10회 FIFA 월드컵 대회를 위해 새로운 트로피 디자인을 공모했다. 총 53개의 작품이 접수됐고, 그 가운데 지금의 트로피 디자인이 선정됐다. 제10회 월드컵은 서독(지금의 독일)에서 열렸으며, 우승도 서독이 차지했다.

 


(▲ 실비오 가자니가(Silvio Gazzaniga) © FIFA.com)

 

7. 이탈리아 작가가 트로피를 디자인했다.

 

FIFA 월드컵 트로피는 이탈리아 작가인 고(故) 실비오 가자니가(Silvio Gazzaniga)의 작품이다. 그는 UEFA(유럽 축구 연맹)컵, UEFA 슈퍼 컵, 21세 이하 및 23세 이하 UEFA컵 등 다양한 트로피들을 디자인했다. 그중에서도 역시나 월드컵 트로피가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8. 트로피를 거머쥐었던 나라는 총 8개국이다.

 

1930년부터 지금까지 총 22번의 월드컵이 열렸지만, 트로피를 거머쥐었던 나라는 독일(1954년, 1974년,1990년, 2014년 총 4회), 아르헨티나(1978년, 1986년, 2022년 총 3회), 이탈리아(1934년, 1938년, 1982년, 2006년 총 4회), 브라질(1958년, 1962년, 1970년, 1994년, 2002년 총 5회), 프랑스(1998년, 2018년 총 2회), 스페인(2010년 총 1회), 우루과이(1930년, 1950년 총 2회), 잉글랜드(1966년 총 1회) 등 8개국으로 압축된다.

 


(▲ 피클스(Pickles)가 트로피를 발견한 곳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Getty Images)

 

9. 첫 번째 트로피는 두 차례 도난 끝에 행방불명 됐다.

 

안타깝게도 줄리메컵은 두 차례 도난 끝에 행방불명 됐다. 첫 번째는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을 앞두고, 런던에서 전시회를 하던 중에 도난당했다. 우승컵 없이 월드컵을 치러야 하는 상황이 되면서, 전 세계가 발칵 뒤집혔다. 다행히 7일 뒤 트로피가 모습을 드러내는데, 런던 남쪽 지방에서 주인과 함께 산책을 나온 ‘피클스(Pickles)’라는 강아지에 의해 정원에서 발견됐다.하지만 비극은 다시 일어났다. 1970년 브라질이 월드컵 트로피를 영구적으로 소유하게 되면서 브라질 축구 협회 본부에 전시하게 되는데, 1983년에 도난당한 뒤로 영원히 찾을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현재 브라질은 복제품을 만들어 보관하고 있다.

 

10. 처음 트로피를 찾았던 강아지는 영화에 출연했다.

 

1966년 트로피를 찾아냈던 강아지 ‘피클스(Pickles)’는 같은 해 3월 29일 ‘The Spy with a Cold Nose’라는 코미디 영화에 출연했고, 4년 뒤 1970 멕시코 월드컵에도 초대됐다.

 


(▲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 승리한 독일 선수들이 트로피를 들어 올리며 환호하고 있다. (사진 출처: Facebook @trophytour))

 

11. 각 나라의 국가 원수 혹은 월드컵 우승 선수만 트로피를 만질 수 있다.

 

줄리메컵이 도난당한 뒤, FIFA는 ‘각 나라의 국가 원수나 월드컵 우승을 경험한 선수가 아니면 그 누구도 트로피에 손댈 수 없다’는 규정을 만들었다. 축구 선수들에게 월드컵 트로피를 만지는 것이 영광으로 여겨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12. 트로피는 약 3억 원의 보험에 가입되어 있다.

 

줄리메컵과 같은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FIFA는 월드컵 우승 트로피를 25만 스위스 프랑(한화 약 2억 7000만 원) 상당의 보험에 가입해두었다.

 

13. 월드컵 우승팀은 트로피 복제품을 받는다.

 

첫 번째 트로피였던 줄리메컵은 3번 우승한 국가가 소유할 수 있었지만 현재는 트로피 소유권이 완전히 FIFA에 있다. 즉, 우승해도 트로피를 가질 수 없다는 이야기다. FIFA 월드컵 우승국은 진품 트로피를 잠시 보관하다가, 도금된 복제품을 받는다.

 

14. 진품 트로피는 FIFA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FIFA 월드컵 트로피는 스위스 취리히에 위치한 FIFA 본사에 있다가, 2016년부터 FIFA 세계 축구 박물관(FIFA World Football Museum)에 보관되고 있다.

 


(▲ 사진 출처: 인스타그램 @trophytour)

 


(▲ 사진 출처: 인스타그램 @trophytour)

 


(▲ 2014년 한국에서 열린 FIFA 월드컵 트로피 투어 모습)

 

15. 일반인들이 트로피를 가까이서 볼 수 있도록 ‘트로피 투어’를 개최한다.

 

일반인들이 FIFA 월드컵 트로피를 눈앞에서 볼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을 것이다. FIFA 월드컵의 오랜 파트너사*인 코카-콜라는 2006년 독일 월드컵부터 ‘FIFA 월드컵 트로피 투어(FIFA World Cup™ Trophy Tour)’를 진행해오고 있다. 트로피 투어는 전 세계 축구팬들이 월드컵 진품 트로피를 직접 눈앞에서 보며 월드컵의 성공을 기원하고 감동을 나누는 행사로, 축구와 관련된 다양한 이벤트와 프로그램도 함께 즐길 수 있다. 올해로 4회째를 맞았다.

 

 

 

 

16. 트로피 투어를 위해 코카-콜라 비행기가 제작됐다.

 

FIFA 월드컵 트로피는 코카-콜라 비행기를 통해 전 세계로 운반된다. 

 

 

 

 

출처 : 코카콜라 코리아 홈페이지(https://www.coca-cola.co.kr/stories/sports/world-cup/interesting-facts-of-fifa-world-cup-tro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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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World Cup 2022 win does for Lionel Messi's legend (espn.com.sg)



킬리안 음바페는 승부차기에서 프랑스의 첫 키커를 맡아 골망을 흔들었다. 앞선 해트트릭에 이어서 4번째로 에밀리아노 마르티네스가 지키는 골문을 뚫어낸 순간이었다. 그에 이어서, 리오넬 메시가 아르헨티나의 포문을 열기위해 등판했다.

 

 

옛말에 따르면, 승부차기에서 최고의 키커는 마지막 순간이나 탈락의 위기에서 기용해야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번 결승전이나, 나아가서 이번 월드컵에서 그런 전통이나 지혜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메시는 골반에 손을 얹고 잠시 멈춰섰다가 이내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곧 그는 공과 프랑스의 골키퍼 위고 요리스를 정 반대 방향으로 날려버렸다. 이제 1 대 1이 되었고, 승부는 메시의 손을 떠나갔다. 그리고 아마도, 그곳엔 아주 큰 해방감이 있었을 것이다. 아르헨티나의 우승을 위해서 메시는 더 이상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이제는 열띤 응원과 주장으로의 역할만이 남았고, 메시는 포옹과 하이파이브로 아르헨티나의 다음 키커들을 마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곤살로 몬티엘이 패널티 킥을 성공하고 4 대 2 상황을 만들면서 아르헨티나는 챔피언이 되었다. 하지만 메시가 "이제 내 역할은 끝났다."라는 깨달음을 얻었던 순간은 그보다는 더 일렀을 것이다. 어떤 면에 있어선, 우리가 앞으로 길이길이 자손들에게까지 이야기 해줄 카타르의 일요일 밤은 메시에겐 월드컵 우승 실패라는 꼬리표가 마지막으로 따라다녔던 날이었다.

 

 

팀 스포츠에서 개인의 커리어라는 건 무척이나 독선적인 기준이다. 그리고 특히나 축구란 스포츠에선 더욱 이상한 일이다. 선수들은 최대 4~5번의 기회만이 있을 뿐이고, 만약 운이 좋다면 아주 어린 나이에 첫 기회가 올 수도 있지만 또 마지막 기회의 순간엔 이미 너무 늙어 있을지도 모른다. 대회가 진행되는 순간에 컨디션이 좋다는 보장도 없고, 클럽 축구처럼 국적을 선택할 수 없기에 주변 동료들의 수준에 기대야만 한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에겐 월드컵 우승이 없다. 요한 크루이프도, 그리고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도. 

 

 

이번 우승이 메시의 GOAT 여부를 결정짓는 요소는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지난 시간동안 메시를 가려왔던 부당한 구름이 걷히는 순간이라는 점이다. 

 

 

메시의 아르헨티나 국가대표 데뷔전은 단 2분만에 끝났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하나의 징조같았다. 2005년 여름, 바르셀로나의 영재였던 18살의 메시는 63분만에 교체로 데뷔전을 치루게 되지만, 이내 팔꿈치로 상대 선수를 가격하고 2분만에 퇴장당하게 된다. 

 

 

메시의 커리어가 활짝 꽃 피우고, 클럽엔 우승 트로피를, 본인은 발롱도르를 쌓아나갔던 순간에도, 또 아르헨티나의 최다 골 기록을 다시쓰고 (2016년) 최다 출장 기록을 경신 했을 때도 (2021년 여름) 언제나 그에겐 의심의 시선이 함께했었다. 아르헨티나엔 언제쯤 우승 트로피를 가져다줄 수 있을까? 

 

 

실제로 아르헨티나의 어떤 사람들은 메시에게 간절함이 부족하다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결국 메시는 13살에 아르헨티나를 떠나 바르셀로나에 정착한 사람이니까. 그리고 2016년, 코파 아메리카 결승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메시는 축구협회와 이견이 있었음을 밝히면서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한다. 전국적으로 메시의 복귀를 바라는 캠페인이 있었고, 이는 메시의 애국심에 대해 의심하는 불합리함의 민낯을 밝혀냈다. 그리고 결국 2018년 러시아 월드컵 진출권을 따내기 위해, 메시는 돌아오게된다.

 

 

그럼에도, 메시에게 있어서 국가대표 커리어는 큰 오점이었다. 4번의 코파 아메리카와 3번의 월드컵에서 준우승만 3번. 후회와 '이랬으면 좋았을텐데'하는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메시의 팬들은 2019년 코파 아메리카가 터닝포인트였다고 지목한다. 아르헨티나는 개최국 브라질에게 4강에서 무릎꿇게 된다. 그리고 경기가 끝난 이후, 메시는 메시 답지 않았다. 그는 심판을 비난했고, 이전에는 거의 볼 수 없었던 날카로운 모습들을 연출했다. 메시는 이미 몇년 전에 아르헨티나의 주장을 맡기 시작했지만, 이런 화나고, 비꼬는 모습의 왈패 메시는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네덜란드전 이후에도 이 메시가 나왔는데, 베호르스트에게 "뭘 꼬라봐 바보야"라는 말을 했다."

 

 

2021년 여름, 메시는 드디어 그동안 등에 지고있던 국대 무관의 저주를 떨쳐내고 조국을 코파 아메리카 우승으로 이끌게 된다.

 

 

어떤 부분에 있어선, 지난 여름에 있었던 모든 일들은 이번 월드컵 우승의 전주곡처럼 느껴진다. 아르헨티나의 감독 리오넬 스칼로니는 2010년의 마라도나나 2018년의 삼파올리와 다르게 선수들에게서 언론플레이와 멘탈 흔들림을 막아내는데 성공했고, 아르헨티나는 긴 무패행진을 이어가면서 메시 의존도를 줄이는 시스템을 장착하는데 성공한다. 메시는 팀의 승리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맡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팀의 전체는 아니었다. 또 PSG에서 네이마르나 음바페와 같은 스타 선수들과 뛰는 부분이 메시가 받는 스포트라이트를 일정부분 줄여주기도 했다.

 

 




이제는 모든 것이 메시의 월드컵 우승이라는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기란 어렵지 않을테지만, 그것이 지금까지 메시가 아르헨티나를 어떻게 이끌어 왔는지 잊어버리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

 

 

사우디아라비아에게 첫 경기를 패배한 아르헨티나에게 있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경기였던 멕시코 전에서 메시는 0 대 0의 균형을 깼다. 그리고 결승까지 토너먼트를 진출하는 과정에서 모든 경기 득점을 올렸다. 결승전 프랑스를 상대로는 1 대 0을 만드는 첫 패널티를 성공시켰고, 역습의 기점 역할을 하면서 2 대 0을 만드는데 공헌했으며, 연장전에선 몬티엘이 핸드볼 반칙을 저지르지만 않았다면 결승골이 되었을 재역전골을 넣기도 했다.

 

 

해트트릭을 기록한 음바페를 상대로 승리를 거뒀다는 점은 아주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이건 현재를 두고 싸우는 '곧 과거의 유산이 될 사람'과 '다가오는 미래'의 대결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메시의 현재'였다.

 

 

GOAT 논쟁에 있어서 메시에게 월드컵은 사실 필수적인게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메시는 22년의 해외생활을 보내면서도 조국과 동료들에게 우승컵을 선사하고자 노력했다. 메시가 아르헨티나에 빚을 졌기 때문이 아니라, 메시가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어떤 사람들은 메시가 이번 월드컵에서 우승했기에 그를 축구계 GOAT위치에 둘 수도 있다. 모두에겐 각자의 기준이란게 존재하는 법이니 그들을 존중한다. 

 

 

사실 필자에게 있어서, GOAT란 것은 단순히 기록으로 비교할 수 있는게 아니다. 그건 마치 사과와 돼지를 비교하는 것과 같다.

 

 

메시는 챔피언스 리그에서 4번 우승했다. 하지만 펠레는 브라질 정부가 펠레의 해외 이주를 막기위해 출국을 금지시켜서 챔피언스 리그에서 (당시 기준으론 유러피안 컵) 뛸 기회조차 없었다. 그리고 마라도나의 시대에 챔피언스 리그를 뛰기 위해선 단지 리그에서 4위 안으로 마감하는게 아니라 1위를 차지했어야만 했다.

 

 

펠레의 커리어 대부분 동안, 그는 전세계 각곳에서 모인 최고 수준 동료들의 지원을 받지 못 했다. 그리고 이건 한 클럽에 3명의 외국인 선수만 보유할 수 있던 마라도나도 마찬가지였다. 메시는 엄청나게 양극화 된 시대에서 살고 있다. 그가 뛰었던 바르셀로나, 그리고 PSG같은 메가 클럽은 때때로 상대팀보다 10배, 20배, 30배 혹은 40배에 달하는 자금을 가지고 있었다.

 

 

또 당대의 기록들만 세울 수 있기에 성취와 위대함을 혼동하는 경우가 있다. 월드컵에서 우승하는 것은 '성취'지만 그렇다고 그게 '위대함'으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현대의 선수들이 더 좋은 경기장, 발전한 스포츠과학, 우수한 유전자, 개량된 훈련 등으로 더 낫다고 이야기하는 단순한 길을 택할 수는 없다. 1968년의 바비 찰튼 경을 지금 시대로 데려온다면 아마도 해리 케인이 그보다 훨씬 더 좋은 선수일 가능성이 무척이나 높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바비 찰튼이 물로켓이란 의미인가? 내 사전에선 절대 아니다.

 

 

누군가에게 있어, 위대함이란 기준은 무척이나 추상적이다. 펠레와 마라도나는 각각의 방식으로 메시에게는 없는 카리스마와, 존재감 그리고 사회적 영향력이 있었다. 그건 메시가 축구선수로서 그들보다 부족해서가 아니라, 성정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때때로 위대함과 성격은 떼어놓을 수 없다. 만약 무하마드 알리가 그저 "캐시어스 클레이" (무하마드 알리 본명)로 남아서 인터뷰도 지루하고 정석적으로 임하고, 사회적 이슈에 대한 발언도 자제했다면 그가 "가장 위대한 선수"로 남을 수 있었을까? (스스로를 변화시킨 부분에 있어선 알리를 존경하지만, 무슨 뜻인지 이해했으리라 믿는다.) 

 

 

메시는 월드컵 우승을 통해서 여러 기준을 통과하게 되었다. 내 논리에 들어맞지는 않지만. 나? 나는 그저 이 위대한 선수가 보답받았다는 부분에 아주 행복하다. 하지만 메시는 단지 그의 발에 공이 있던 순간만 위대했던게 아니다.

 

 

이번 대회를 복기하자면, 리오넬 스칼로니 감독은 '신뢰', '동료들에게 본인의 운명을 맡긴다', 그리고 '그들을 믿는다'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했다. 그리고 이건 메시가 월드컵 내내 보여줬던 자세며, 특히나 승부차기를 성공시키고 센터써클로 돌아오는 모습에서 가장 강조되었던 부분이기도 하다.  

 

 

메시는 동료들에게 믿음을 주었고, 동료들은 메시가 이때까지 그들에게 해왔던 것처럼 메시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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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istiano Ronaldo. Yesterday’s man - The Athletic

 

경기 종료 휘슬이 울렸을 때, 월드컵 8강전뿐만 아니라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평생의 야망에도 종료 휘슬이 불렸다.

 
포르투갈의 가장 위대한 축구 선수인 호날두는 이제 결코 월드컵에서 우승하지 못할 것이다. 호날두는 최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결별한 후 곧 38세가 될 예정이다. 현재 가장 유력한 행선지는 사우디 아라비아 리그로 보이며 심지어 2026년 여름 41세의 나이로 월드컵에서 한 번 더 기회를 받을 수 있다고 기대하는 자신감이나 어쩌면 망상도 가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결국, 월드컵 탈락은 최근 가까운 곳에서 호날두를 관찰한 모든 사람들에게 지긋지긋할 정도로 익숙했다.
 
호날두는 포르투갈이 모로코에 1-0으로 패한 후 경기장을 떠난 첫 번째 선수였다.
 
자신에게 달려드는 난입한 팬을 거의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같았고, 이 토너먼트 탈락에 멍해졌다.
 
터널 안에서 카메라들은 국가대표 최다 득점자 기록을 가지고 있는 호날두가 스포츠 최고 권위 트로피를 들어올리지 못하고 물러서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포착했다. 그리고, 마음속 깊이, 호날두는 또한 자신의 가장 큰 라이벌인 리오넬 메시가 앞으로 8일 동안 영광의 자리를 차지할 기회가 남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호날두에게 이것은 겸손한 월드컵 시즌 동안 또 다른 초라한 경험이었다.
 
이 초라함은 올드 트래포드에서 두 번째 기간이 끝나는 것으로 시작되었고 명성이 더욱 떨어짐으로써 끝이 난다.
 
아마도 그날 밤 가장 주목할 만한 통계는 국가대표 최다 득점자 호날두가 월드컵의 토너먼트에서 단 한 골도 넣지 못한 채 선수 생활을 끝낼 것이라는 사실일 것이다.
 
열렬한 팬들이 이번 세대에서 가장 위대한 축구선수라고 주장하는 선수에게는 놀라운 사실이다.
 


호날두는 8번의 월드컵 토너먼트에 출전했지만, 이번 대회 동안 16강 스위스와 토요일 모로코를 상대로 한 두 번의 출전은 대체 교체 출전이었다.
 
호날두에게 이번 임무는 스위스와의 경기에서 교체 투입됐을 때와는 매우 달랐지만, 두 경험 모두 개성이 독특한 선수에게는 고문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페르난도 산투스 감독이 스위스와의 경기에서 호날두를 선발 명단에서 제외했을 때 대신 출전한 곤살루 하무스가 해트트릭을 기록해 이 선택을 전적으로 입증했다. 이 경우 호날두는 포르투갈이 골을 내준 후 교체 투입된 것이 자신이 원하는 것보다 늦었다고 느꼈을 것이다. 호날두는 39분을 남겨두고 투입됐다.
 
하지만 호날두가 투입됐을 때도 팀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했다. 5개의 패스만을 시도해 3개를 성공했다. 공을 10번 잡았는데, 그 중 3번은 모로코 페널티 지역에서였다.
 


호날두는 단 한 번의 골 찬스를 맞았는데, 이 낮게 찬 공도 야신 부누가 막았다. 호날두의 존재는 동료들이 예리한 전진 플레이 대신 크로스 의존 플레이로 눈을 돌렸기 때문에 인내심을 줄이고 절박함을 더 부추기는 것 같았다.
 
또 다른 노장 페페(39)는 후반 헤딩슛으로 동점골에 가장 가까이 다가섰으나 빗나갔고, 모로코 수비수 자와드 엘 야미크는 공이 빗나가는 것을 보고 페페 머리에 뽀뽀할 정도로 겁을 먹었다.
 


엘 야미크는 현재 레알 바야돌리드에서 뛰고 있는 저니맨이다. 레프트백에서는 야히아 아티야트 알라가 뛰어났고, 그는 모로코 리그 와이다드 카사블랑카에서 뛰고 있다. 여러 면에서 아무도 누군가가 되지 않는 위대한 평준화인 월드컵의 아름다움을 보여줬다.
 
아티야트 알라와 같은 선수가 호날두와 같은 엄청난 명성을 극복할 수 있는 곳. 2부 리그로 강등된 번리에서 임대로 팀을 떠난 네덜란드의 바웃 베르호스트와 같은 선수가 아르헨티나의 리오넬 메시를 절망의 지경으로 몰아갈 수도 있었을 뻔한 순간.
 
물론 모로코는 이번 월드컵 5경기에서 크로아티아, 벨기에, 스페인, 포르투갈을 상대로 클린 시트를 기록하며 강력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스페인과의 경기에서 유효 슈팅 하나를 내줬고, 포르투갈에게는 세 개를 내줬다. 호날두는 이제 피니셔에 불과하고 이번 시즌에도 불규칙했지만, 여기서 호날두는 기회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팀에서 뛰었다.
 
포르투갈은 변명을 위해 허둥댔다. 페페는 아르헨티나 심판 파쿤도 텔로를 비난했다.
 
페페는 "우리는 우리가 예상하지 못했던 골을 허용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꼭 말하고 싶습니다. 아르헨티나 심판이 이 경기 휘슬을 불었다는 것은 받아 들일 수 없습니다. 어제 메시와 있었던 일 이후로 말이죠."라고 말했다.
 
"아르헨티나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들 보고, 심판이 이 경기를 관장했습니다. 심판이 편파를 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후반전에 어떤 플레이를 했나요? 상대 키퍼는 항상 땅에 몸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심판은 단지 8분이 더 걸렸다고 말했죠. 우리는 진지하게 뛰었는데 이 심판은... 8분?"
 
포르투갈의 미드필더 브루노 페르난데스는 아르헨티나가 대회에 남아 있을 때 아르헨티나 심판이 주심을 맡아야 한다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페르난데스는 "아르헨티나에 트로피를 줄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때, 포르투갈 언론 담당자가 페르난데스의 팔을 건드렸지만, 페르난데스는 "상관없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것을 말하고 그렇게 해야죠. 아직 경쟁 중인 나라 출신의 심판이 주심을 하는 것은 정말 이상합니다. 분명히 우리에게 불리하게 판정이 내려졌죠."라고 말했다.
 
산투스 감독은 좀 더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우리는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었고 그렇게 하지 못했기 때문에 심판을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그건 말이 안 돼요."
 
산투스가 내일 아침 SNS의 특정 유저들, 특히 호날두의 애인인 조지나 로드리게스의 계정을 피하고 싶어했을지도 모른다. 조지나는 산토스가 처음부터 호날두를 선발하지 않은 것을 잘못했다고 말했고,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선수를 과소평가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경기 후 기자회견에서 산투스는 전혀 후회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산투스는 "후회는 없습니다. 스위스를 상대로 매우 잘한 팀을 선발했다고 생각합니다. 호날두는 훌륭한 선수예요. 우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때 투입됐으니, 후회는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산투스에게 있어, 포르투갈을 위해 현재와 미래가 이 대회의 많은 부분을 지배하고 있는 호날두에 대한 질문을 받지 않고 이제 몇 주를 쉴 수 있다는 안도감이 있을 것이다.
 
영국 방송인 피어스 모건과의 인터뷰는 월드컵을 앞두고 많은 헤드 라인을 장식했으며, 대회가 시작되기 불과 며칠 전에 맨유와의 계약 해지가 확정됐다.
 


호날두는 첫 경기에서 가나를 상대로 페널티킥으로 득점하는 등 긍정적인 순간을 몇 번 가졌다. 그렇게 함으로써, 5번의 월드컵에서 득점을 한 최초의 선수가 되는 놀라운 위업을 달성했다.
 
하지만 이번 시즌에 호날두의 유일한 골은 유로파 리그에서 셰리프를 상대로 두 번, 프리미어리그의 에버튼을 상대로 한 번 나왔다.
 
산투스는 호날두의 충성파로 남아 있었지만, 경기 전 기자회견에서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고, (옆에 앉아 있던)페르난데스가 전 맨유 팀 동료에 대해 또 다른 답변을 해야 할 때 의자에 몸을 기대고 한숨을 쉬기도 했다.
 
호날두는 우루과이를 상대로 골을 넣으려 했고, 또 자신이 골을 넣었다고 생각했지만, FIFA의 기술은 골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후 호날두는 한국과의 경기 후반전에 교체되는 것에 대해 심술궂게 반응했다. 검지 손가락을 입술에 댔고, 나중에 상대 스트라이커 조규성이 빨리 나가라고 말한 것에 짜증이 났다고 설명했다. "그에게 입을 다물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말 할 권한이 없죠. 그는 아무 말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산투스는 호날두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했고, 처음으로 과감한 결정을 내려 지구상에서 가장 유명한 선수를 벤치로 내릴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느낌은 스위스 경기 전 점심시간 회의에서 결실을 맺었다. 산투스는 "호날두를 사무실로 불렀습니다. 항상 선발 선수였기 때문에 그것에 만족하지 않았죠. 호날두는 제게 '좋은 결정이라 생각하세요?'라고 물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번 모로코와의 경기에서 패배한 후, 호날두가 지금 어떤 다른 감정을 느낄 것이라고 믿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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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와 메시에게는 아직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모두 멕시코와의 경기에서 우리가 득점할 때까지 겪은 긴장과 불안감, 그리고 또한 2-0으로 승리한 후 마지막 휘슬에 대한 안도감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사우디아라비아에 패한 후 우리에게는 많은 압박감이 있었고, 그 안도감은 모든 사람들, 팀 전체와 여기 있는 모든 우리 팬들, 그리고 특히 메시에게 있었습니다.

 

아마 그의 마지막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가 조별리그에서 탈락하는 것을 보는 건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결말이었을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16강에 있지 않습니다. 폴란드를 상대로 다시 승리해야 해낼 수 있습니다.

쉽지 않고, 팀은 여전히 더 향상되야 하지만 다행히 우리는 멕시코를 상대한 후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아르헨티나가 토너먼트에서 더 나아가는 것은 힘들것이라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아르헨티나 팀에 대해 다시 꿈꿀 수 있습니다. - 왜냐면 메시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월드컵이 메시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습니다'

 

저는 메시가 아르헨티나 대표팀 여정을 시작하는 곳에 함께 있었고, 그가 이번 월드컵 트로피를 들어올리면서 대표팀의 여정을 마무리할 수 있기를 매우 바랍니다.

 

우리가 20세 이하 대표팀을 위해 함께 했던 첫 훈련에서 그가 공을 터치하는 것을 봤을 때, 나는 그가 매우 특별한 선수가 될거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물론 그를 만나기 전에 바르셀로나에서의 메시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있지만, 그가 아르헨티나를 위해 뛰러 온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으니까요. 그 때 그는 말을 많이 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아주 따뜻하게 팀에 맞아주었고, 그가 얼마나 훌륭한지 빠르게 깨달았습니다.

 

그는 17살일때 네덜란드에서 열린 2005 U-20 월드컵에 우리와 함께 나갔습니다. 저는 당시 주장이었고 우리는 토너먼트에서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메시와 함께 팀동료로서, 그리고 친구로서 그와 많은 순간을 공유한, 그의 세대의 일부가 됐다는 것이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가 겪은 희생과 그가 겪은 힘든 시간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잊지 마세요. 그가 스페인으로 이주 했을때의 나이는 불과 13살이었다는것을요.

 

저 또한 제 커리어를 위해 어린 나이에 아르헨티나를 떠나야 했습니다. 적응하는데 얼마나 힘들었는지 잘 알고 있지만 제가 세비야에 합류했을 때는 저는 20살이었고 메시는 그저 어린 소년이었어요.

 

이후 그가 인생에서 했던 모든 것이 자랑스럽지만, 그가 아르헨티나를 대표하는 것이 얼마나 의미가 있는지, 그리고 우리와 함께 축구에서 가장 위대한 트로피를 들어올리고 싶어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항상 똑같아요. 메시는 월드컵에서 우승해야만 합니다'

 

지금이야 고국에서의 메시에 대한 애정이 많지만 항상 이렇지는 않았습니다.

 

2014년 월드컵 결승전에서 패한 후 우리는 코파아메리카 2015와 2016 또다른 두 개의 결승전에서도 패배했습니다.

몇몇 사람들과 우리 언론의 일부에게, 단지 결승전에 도달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당시 메시가 바르셀로나에서 했던 것처럼 우리가 모든 것을 쟁취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메시에 대한 비판이 많았습니다.

 

이후 대표팀을 포기하고 재충전의 시간을 가졌지만 그는 대표팀이 자신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빠르게 깨달았습니다.

메시는 다시 돌아와 우리가 이기는 것을 돕기 위해 필사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작년 코파 아메리카에서 그의 첫 메이져 트로피를 차지한 것은 매우 놀라웠습니다.

 

그 우승은 그의 부담감을 조금 덜어주었고, 그가 클럽에서 뛰던 방식으로 우리를 위해 뛰지 않았다고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멈췄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사람들은 월드컵에서 메시에게 많은 것을 기대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대회가 메시에게 정신적으로 힘든 시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것은 그가 릴렉스 할 수 있도록 도와줄 적절한 사람들을 두는 것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무엇이 바뀌었는가? 메시는 성숙해졌다.'

 

2018년 월드컵 당시 저는 러시아에서 BBC 전문가로 있었는데, 멀리서도 메시가 스트레스를 받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매우 걱정이었습니다. 그 팀은 좋은 위치에 있지 않았고 일찍 탈락했습니다.

 

제가 그와 함께 있었던 2014년 브라질에서 결승에 오른 아르헨티나 대표팀하고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는 당시 팀을 이끌고 있었고 팀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이번 대회가 시작되기 전에 메시가 그때 느꼈던 기분과 지금 선수단의 분위기가 비슷한 점이 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건 정말 좋은 징조인데 그것은 같은 연대감이 있다는 걸 의미하고, 또한 그가 행복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메시가 말을 할때는 모두가 듣습니다. 2014년에도 마찬가지였죠. 하지만 메시는 항상 조용했고 많은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우리의 주장이었지만 그의 경험과 성격 때문에 하비에르 마스체라노가 그 역할을 대신 맡았었죠. 마스체라노는 경기 전 라커룸에서 우리를 준비시키는 목소리가 아주 큰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그것을 하는 사람은 메시 자신입니다. 그는 우리의 최고 선수일 뿐만 아니라 최고의 리더입니다.

그리고 그는 골을 넣는 것만이 아니라 그런 방식으로 이 어려운 시작을 헤쳐나갈 수 있도록 동료들을 도울겁니다.

35세인 메시는 더 성숙하고, 더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고, 가정적인 남자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놀라운 축구선수죠.

 

만약 메시가 이번 월드컵에서 우승한다면, 그는 가능한 모든 것을 이뤘기 때문에 바로 은퇴해야 합니다.

그가 쟁취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을테니까요.

 

 

https://www.bbc.com/sport/football/636968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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